'SNS시대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남기' 읽고
 

정말 오랜만에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연말이라 학교 일정 때문에 바쁜 제가 틈틈히 시간을 내서 읽은 책은 바로 'SNS시대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남기'라는 책입니다.

바로 저희 아버지가 내신 책입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만드신 책은 몇 권이 있지만 전부 어려워서 항상 나중에 어른이 되면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내신 'SNS시대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남기'라는 책은 고등학생인 저한테도 별로 어렵지 않고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곧바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책이 잘 읽히지 않았습니다. 책은 4가지 정도의 파트로 나눠져 있었는데 제가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지역신문 킬러콘텐츠에 관한 부분부터 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파트의 대부분은 지역신문이 다루는 콘텐츠와 외국의 지역신문이 다루는 콘텐츠를 보여주며 비교와 배울 점을 분석하여 정리해 놓은 어려운 말들로 되어있었습니다.

그 부분은 저에게 좀 어려워서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신문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잘 모르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 인터넷에 검색해 보거나 아버지에게 물어보러 갔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모르는 단어를 가르쳐주시면서 저에게 어려운 부분은 건너뛰고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제가 재미있어 하고 금방 이해가 될 것 같은 부분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바로 블로그에 관한 파트였습니다.

저 또한 블로그를 약 5년간 운영해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적은 블로그 파트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공감가는 부분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블로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파트에서도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바로 기자가 블로그를 하면 좋은 점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항상 저희 아버지가 블로그를 하시는 이유를 궁금해 하고있었습니다. '이미 신문기자를 하시면서 충분히 바쁘실텐데 왜 굳이 블로그를 하시는걸까?'

그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책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기자가 블로그를 하면 좋은 점이 뭘까'라는 주제로 기자들이 블로그를 했을 때 생기는 시너지 효과를 정리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언급하자면 
- 틀에 박힌 기사 작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글쓰기 실험을 할 수 있다.
- 광고 수익과 간접 수입이 짭짤하게 생긴다. 노후대책도 될 수 있다.
- 기자들의 글쓰기 실력이 늘어 돈 안 들이고 교육이 가능하다.

등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자가 블로그를 했을 때 좋은 점들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제가 언급한 내용은 제가 읽은 것 중에서 인상깊었던 부분이고 책에는 훨씬 더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이 바로 10대, 20대 블로그 실태에 대한 내용입니다. 책에서는 10대 20대가 아직 블로그를 많이 접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10대 20대는 아직까지도 네이버 블로그나 미니홈피 등을 이용하면서 연예인이나 자기 사진을 올리는 용도로 밖에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업이나 취업이 가까운 문제인 10, 20대에게는 블로그라는 미디어 매체를 운영할 여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에서는 저의 블로그를 예로 들면서 학생에가 블로그가 좋은 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블로그 운영은 대학 진학 또는 취업에서 유용한 실적자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블로그라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공간이고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모으면 포트폴리오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몇 년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작성한 몇 백개의 글을 대학 지원을 하기 전에 벼락치기로 만들 수는 없기에 블로그는 학생에게 있어서 자신이 만들어 가는 성장기록인 셈이죠.

아버지가 직접 책을 선물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책에서 언급되는 저의 블로그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제가 그 동안 블로그를 정말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운영해왔다는 것을 세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블로그가 내 인생에 있어서 많은 도움과 영향을 줄 것이고 블로그를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도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저도 블로그에 적은 수 많은 글들을 모아서 아버지처럼 책 한 권 내야겠죠. 



SNS시대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남기 - 10점
김주완 지음/산지니

 
연말과 새해를 맞아 오랜만에 1년만에 아버지와 단 둘이서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듯이 유럽으로 출장을 가셨습니다.

늘 1월 1일 되면 아버지와 함께 등산이나 여행을 갔습니다.
2년전 1월 1일에 아버지와 겨울 지리산에 가서 죽을 뻔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번에는 1월 1일에 아버지가 출근을 하셔야 했기 때문에
12월 30일(금)에 출발했습니다. 아버지와 제가 버스를 타고 간 곳은 바로 통영!!!

바다를 비롯한 싱싱한 해산물이 유명한 고장이었습니다. 학교 때문에 오후에 출발해서 통영에 도착하니 벌써 밤이 다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잠을 잘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저희가 먼저 찾은 곳은 통영의 해저터널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강압적인 노동을 강요하여 만든 터널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만들어진 터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터널은 매우 정교하고 완벽하게 지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시대에 바다 밑을 지날 수 있는 해저터널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굉장했습니다.


해저터널을 걸어가 보니 비록 벽이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기에 터널 속에서 바다를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바다 밑을 걷고 있다는게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해저터널을 나와보니 통영의 아름다운 밤바다가 저와 아버지를 반겼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바다가 훤히 보이는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짐을 챙겨서 아침을 먹으러 갔습니다. 아침은 KBS의 1박2일에서 나왔던 충무김밥 식당에 가서 먹었습니다.

확실히 충무 김밥은 매우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아버지 둘 다 충무 김밥을 좋아했기 때문에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아침을 먹고는 여행의 원래 목적이었던 미륵산 등산을 갔는데 그 등산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포스팅 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륵산 등산을 끝내고 산에서 내려와 보니 바다위에 있는 거북선이 보였습니다. 통영은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과 판옥선을 가지고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곳입니다.

그래서 그 때의 영광을 기억하기 위해 통영의 바다 위에는 거북선이 남아있었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얼른 거북선 안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거북선 안에는 임진왜란 때의 모습을 보여주는 박물관처럼 많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물건들은 너무도 많이 봐서 별로 관심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관심이 가는건 거북선 안에 있는 콘센트!! 아버지는 그 콘센트를 보시고는 "조선시대에도 전기를 사용했나?" 라는 농담을 하셨습니다.


사실 아버지의 고향인 남해에서도 노량해전이 펼쳐져서 거북선이 있습니다. 남해에 있는 거북선은 통영의 거북선보다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통영의 거북선에는 실망이 조금 되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 간 곳은 통영의 '동피랑 마을' 입니다. 통영이 꽤 좁았는지 해저터널, 미륵산, 거북선, 동피랑 마을 등의 유명한 관광지들이 전부 가까워서 다 걸어서 관광했습니다.

동피랑 마을은 이름처럼 아주 아름다운 마을로 유명합니다. 바로 벽화골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 있는 벽화골목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선 벽화의 그림실력이 화가의 수준에 도달합니다. 또한 아이디어가 정말 톡톡 튀는 그림들을 몇 개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자전거를 그림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림으로 골목을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동피랑 마을도 몇 달 전에 와봤기 때문에 오래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버지가 출근을 하셔야 했기 때문에 빨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여행을 떠나면서 느낀게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 저도 조금만 있으면 어른이 되고 바빠지다 보면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있을 시간이 점점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부모님과 여행을 갈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가자'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가 기숙사라서 지금도 부모님을 자주 만날 수 없는데 어른이 되면 얼마나 만나겠습니까?

이제 조금만 있으면 방학이고 여름방학 때 처럼 외국에 가지도 않으니까 이번 겨울방학 때에는 부모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가지겠습니다.
저번부터 계속 언급했듯이 작년 겨울에 지리산 갔을 때와 이번에 지리산 갔을 때, 지리산의 모습은 정말 달랐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계절때문이겠죠. 겨울과 여름은 계절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기때문에 지리산의 경치또한 심하게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역시 작년에 갔을 때 봤던 곳이 기억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작년 지리산에 가서 춥고, 힘들고, 배고프고, 피곤했던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나 봅니다.

하지만 기억에 전혀 없는 장소도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작년과는 전혀 다른 코스를 갔기 때문입니다. 훨씬 더 길고 훨씬 더 힘든 코스를 이번에 갔습니다.

작년에는 지리산에서 총 13km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무려 35km 가까이 걸었습니다. 우리들은 화엄사에서 출발했는데 지리산을 쭉 돌아서 장터목까지 간 다음, 중산리로 내려왔습니다.

일정을 조금 세부적으로 적자면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4시간정도 걸려서 올라갔습니다. 거기에 가서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그냥 놀았습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그냥 말뚝박기나 닭싸움, 팔씨름 같은 놀이를 하며 육체적으로 힘들어가면서까지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리고는 수육을 다같이 먹고 모두들 다 잠이 들었습니다. 저도 피곤해서 그날 밤 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대피소에서의 잠자리가 많이 불편했던지 금방 깨고말았습니다.

잠이 들기 직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잠에서 깨어나자 시간은 겨우 새벽 3시..... 잠도 안오고 그냥 그 자리에서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짐도 다 싸고나니 더이상 할게 없었습니다.

짐을 다 챙겼다고 해서 먼저 출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는 가방을 들고 대피소밖으로 나갔습니다. 대피소 밖은 너무나 추웠습니다. 마치 겨울의 추운 날씨를 연상시키듯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자 아름다운 별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저는 얼른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들어 하늘을 향해 셔터를 눌렀습니다.

하지만 카메라의 성능때문인지 저의 사진찍는 실력 때문인지 별의 모습은 전혀 찍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쉽게도 그 때 봤던 별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결국 별사진을 찍는건 금방 포기하고 아침밥을 미리 준비하러 취사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한 선배가 미리 일어나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선배에게 초콜릿을 요구했습니다. 확실히 우리 학교는 인심이 좋아서 초콜릿을 금방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거의 30분동안 초콜릿만 먹었습니다.


산에 오니까 평소에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던 초콜릿을 많이 먹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초콜릿을 먹으면서 초콜릿을 준 그 선배와 초콜릿에 대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 선배의 말로는 초콜릿을 많이 먹으면 분명히 두뇌회전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일시적으로 좋아지지만 그 만큼 뇌가 빨리 노화된다고 했습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결론은 초콜릿이 몸에 해롭다는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선배의 충고도 저의 초콜릿 사랑을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30분동안 초콜릿을 '흡입' 하고나서 바로 아침밥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조의 모든 멤버들과 함께 아침밥을 먹고나서 바로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등산이라기보다는 지리산의 능선을 타고 걷는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르막 내리막이 계속 반복되어서 꽤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내리막도 많이 있어서 생각보다 쉽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하천 대피소라는 곳에 도착을 했습니다. 거기까지 도착하는데 물이 모자라서 고생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연하천 대피소에는 바로 눈앞에 식수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식수대가 마치 천국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 식수대에서 물을 실컷먹고 또다시 조의 멤버들과 점심을 먹은 뒤, 바로 출발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걸어서 도착한 곳은 바로 '세석대피소' 그곳은 제가 인생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장소입니다. 세석대피소는 작년 겨울, 아버지와 지리산에 갔을 때 하룻밤을 묵었던 곳입니다.

아버지와 밤늦게 추운날씨와 싸우며 금방이라도 부숴질 것 같은 지친 다리를 이끌며서 거의 죽기 직전에 세석 대피소가 보였을 때 저는 이제는 살았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감정이 북받쳐서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게 벌써 작년 겨울의 일이 되버렸네요. 정확히는 작년 1월 1일의 일이니까 일년도 훨씬 넘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세석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그 때의 감동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세석 대피소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한 번 자봤던 대피소라 그런지 세석 대피소에서는 간만에 편한 마음으로 잘 수 있었습니다.

며칠 전 아버지와 함께 백화점에 갔습니다. 백화점에 간 이유는 제 아이팟 때문이었습니다. 아이팟을 처음 살 때에는 아이팟을 정말 깨끗하게 사용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팟을 사용하다보니 기스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케이스를 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케이스를 사러갔습니다.
 
케이스의 종류는 무난하게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고무 케이스를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가격도 5000원 이하라고 들어서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았습니다.

애플 매장에 가보니 케이스의 종류가 꽤 많이 있었습니다. 플라스틱도 있고, 가죽으로 된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중에 고무로 된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격은 꽤 비쌌습니다. 무려 18500원이나 했습니다. 다른 매장을 알아볼 수도 없고해서 그냥 그 케이스를 구입했습니다.

포장을 뜯어보니 만지면 말랑말랑해서 느낌이 좋은 케이스가 들어있었습니다. 케이스를 아이팟에 '장착'시켜보니 왠지 멋있었습니다.

그 케이스를 끼면 아이팟을 바닥에 떨어뜨려도 충격을 어느정도 흡수해주고 멋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기스가 나는 것도 어느정도 막아줄 것 같았습니다.


케이스를 끼운 상태로 아이팟을 뒤집어 보였습니다. 케이스 때문에 제가 아이팟을 처름 구입할 때 레이져로 새긴 '축 태봉고 합격'이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케이스를 끼우니 아이팟이 더 안전해보이고 더 예뻤습니다.

저는 포장을 한 통을 버리기 위해 통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뜻밖의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액정보호필름' 이었습니다.

그것도 '최고급'이라는 수식어가 함께 붙어있었습니다. 고무 케이스의 가격이 비쌌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액정보호필름 때문이었습니다.

완전 횡재했습니다.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면 기스가 생기는 걸 완전히 막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얼른 집에 가서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잘 안되서 아버지가 대신 붙여주셨습니다.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니 안에 기포가 발생해서 보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금방 아버지가 제거해주셨고 저는 아이팟을 사용해보았습니다.

확실히 터치감이 훨씬 좋아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남아있는 기포때문에 계속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케이스를 씌울 때에는 케이스에 보호필름이 걸려서 결국에는 필름이 벗겨졌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이에 먼지가 들어가서 완전히 이상하게 되버렸습니다. 저는 다시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버지는 몇 번 만져보시다가 저에 필름을 버리라고 권하셨습니다.

저는 반대했습니다. 필름은 비싸기 때문에 너무 아깝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먼지가 들어간 것은 어쩔 수 없다며 단호하게 필름을 버리셨습니다.

확실히 필름을 벗기니 아이팟에 기포가 보이지 않아 훨씬 깨끗해 보였습니다. 필름을 끼우면 좋겠지만 너무 귀찮고 짜증났습니다.

그냥 아이팟 기존의 모습이 가장 편하고 예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필름 없이 사용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냥 케이스만 끼우고 사용해 갈 생각입니다.

오늘은 블로그를 쓸 소재가 없어서 블로그를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며칠 전 할아버지의 첫 제사도 치르고 해서 정리를 하느라 블로그를 쓸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밤 가족이서 다같이 저녁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본 드라마는 '사랑을 믿어요'라는 드라마였습니다.

그 드라마는 시청률도 무척 높고 당연히 무척 재미있는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저는 예전부터 계속 보아왔던 드라마입니다.

그 드라마에는 특별히 주인공이 없습니다. 그냥 시트콤처럼 웃긴 드라마입니다. 여러가족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어머니와 저는 '권서방네 가족'이 가장 웃깁니다.

권서방네는 권기창(권해효 분)이 남편, 김영희(문정희 분)이 아내이며 그 밑으로 세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 가족이 가장 웃기고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남편의 성격때문입니다.

드라마에서 권기창이라는 이름보다 권서방으로 더 많이 불리는 권기창의 세 명의 아들과 아내의 가족 중 가장으로써 권위적이고 항상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무서운 남편이자 아버지입니다.

아내와 아들들은 그런 권기창을 무서워하고 퇴근할 때 항상 일렬로 줄을 서서 군인처럼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권기창은 독재자처럼 아들들을 교육시키고 아내인 김영희는 그런 남편에게 항상 굽신거리며 삽니다.

아내인 김영희는 평소 작가라는 직업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때문에 작가의 꿈은 접고 집안일만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느날 김영희는 결국 집안일만 하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들 세 명을 모두 데리고 자신의 친정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김영희와 아들 세 명은 친정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제가 좋아하는 권기창은 텅빈 집에서 혼자 밥을 차려먹으며 항상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또 어느날 권기창도 결국 참지못하고 친정집으로 도망간 아내에게 전화를 겁니다. 하지만 아내인 김영희는 절대 굴하지 않고 대뜸 화를 내면서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권기창은 또다시 당당하게 아내의 말을 듣고 이제 자신도 봐주지않겠다며 선전포고를 하고는 아들 세 명을 모두 집으로 다시 데려옵니다.

아들들도 친정집이 싫었는지 엄마인 김영희를 배신하고 모두 하나같이 아버지가 계시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들들에게 배신을 당한 김영희는 울면서 남편에게 굴복하고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가 주부가 됩니다.

하지만 김영희는 집에 들어가서도 남편 몰래 작가의 일을 계속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김영희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남편에게 계속 굽신굽신 거립니다.

이런 상황을 참지 못한 큰아들 '권재현(윤홍빈 분)'은 사춘기를 보내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반항도 하고 학교를 다녀오고나서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혼자 공부만 합니다.

그러나 권기창은 그런 큰아들의 반항적인 모습에 분노를 하게되고 발로 차서 들어가 큰아들을 심하게 혼냅니다. 하지만 다시 진정을 하고 권기창은 본래의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가 드릴을 가져옵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드릴을 이용해 큰아들이 또다시 문을 닫고 혼자 방에 있지못하게 하기 위해 아예 문을 뽑아버립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어머니와 저는 정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방송에서는 둘째 아들이 반항을 합니다. 둘째아들은 학교에서 친구를 패고 와서는 파마까지 하고와서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납니다.

친구까지 패고 파마까지 한 둘째 아들에게는 정말 참지 못하는 분노를 느낀 권기창은 자기가 사준 옷을 모조리 벗기고는 내복만 입힌채 둘째 아들을 밖으로 쫒아냅니다.

하지만 곧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둘째 아들을 발견하여 미아로 생각하여 방송으로 부모를 찾는다며 온동네에 마이크로 알립니다.

참을 수 없는 창피함을 느낀 권기창은 몸을 배배 꼬며 웃긴 표정과 말투로 둘째 아들을 다시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렇게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참 많이 있습니다. 드라마가 아니라 거의 시트콤이 맞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 내용 중에서 80%가 웃기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웃음을 위해 보는 드라마가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슬픈 장면도 있고 애틋한 사랑의 장면도 있지만 역시 그냥 웃긴게 많은 드라마인 것 같습니다. 

시트콤은 일부러 웃기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이 드라마는 웃기게 만든게 아니라 그냥 웃기는 장면을 넣은 것 입니다. 어떤 때에는 시트콤보다 더 웃길 때도 있습니다.

저도 이렇게 감동적이면서도 사랑이야기가 들어있고 또 보는 이들을 웃길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싶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가 벌써 6개월정도 되어갑니다. 이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제사는 우리집에서 해야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남해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제사를 지냈지만 지금부터는 할아버지 없이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삼촌이나 고모들도 계셔서 그렇게 걱정될 일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집에 병풍이나 큰 밥상같은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는 제가 삼촌네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떠났을 때 가져왔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정사진과 제사에 필요한 몇가지 물건들을 지난번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남해에 가서 가져왔습니다.

남해에서 가져온 그릇들입니다.

하지만 제사를 지낼 때 가장 중요한 병풍과 상이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집에도 상은 있었지만 제사를 지내기에는 너무 작은 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결국 병풍과 상을 한 개씩 구입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남해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도 병풍과 상은 있었지만 거기에서 병풍과 상을 트럭에 실어서 가져오는 비용이 새로 구입하는 비용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냥 병풍과 상을 새로 구입했습니다.

굳이 남해에 있는 병풍과 상을 가져와서 사용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입해서 주문한 병풍과 상이 오늘 집으로 배달이 왔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경비실에 있는 병풍과 상을 한 개씩 한꺼번에 들고오기로 했습니다. 저는 꾀를 부려서 훨씬 가벼울 것 이라고 예상되는 상을 들기로 했습니다.

크기만 클 뿐 나무라서 별로 무겁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틀렸습니다. 상은 저 혼자의 힘으로 들 수 없을만큼 무척 무거웠습니다.

잘 들지 못하는 저의 모습은 본 아버지는 들고 계신 병풍과 제 상을 바꿔주셨습니다. 병풍은 상보다 훨씬 가벼웠습니다. 병풍은 정말 제가 한 손으로 들 수 있을만큼 가벼웠습니다.

정말 힘을 들이지 않으려고 꾀를 부린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아버지는 웃으시면서 "앞으로 꾀를 부리면 안되겠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정곡을 찔려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으로 와서 저와 아버지는 병풍을 펼쳐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상도 갖다놓으니 꽤 제사를 하는 폼이 났습니다. 저는 얼른 절까지 해보았습니다.

앞으로 영원히 그 병풍과 상을 가지고 제사를 지낼 것 인데 절 정도는 해줘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병풍과 상까지 사니까 이제 정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 실감이 났습니다.

이제부터 예전처럼 열심히 우리집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9월 5일(일요일)에 있는 제사는 우리집에서 처음으로 지내는 제사니 더욱 정성을 다해 지내겠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오랜만에 가족끼리 다같이 여행을 갔습니다. 사실 여행이 아니라 아버지가 강의를 가는데 어머니와 제가 아버지를 따라가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함께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 만으로도 저는 만족했습니다. 우리는 고속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려서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우리를 '유일회관' 이라는 식당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 식당은 전에 아버지가 맛있어서 블로그에 한 번 올린 식당이었습니다.

역시 아버지가 맛있다고 한 만큼 처음부터 맛있는 메밀국수가 나왔습니다. 저는 그 메밀국수가 참 맛있었습니다. 면도 쫄깃쫄깃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국물 맛 이었습니다.

그 메밀국수는 국물이 정말 시원하게 맛있었습니다. 비록 양은 적었지만 저에게 환상적인 맛을 보여준 음식이었습니다.

굴비요리이지만 비린내가 많이 나는 음식입니다.

그 다음에는 굴비를 말려서 구운 요리가 나왔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음식을 아주 맛있게 드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음식을 한 번 먹어보았습니다.

처음 먹을 때에는 약간 맛이 오묘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음식을 먹어보았는데 비린내가 심하게 났습니다. 그 냄새는 하도 고약해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 먹었을 때 약간 오묘했었던 것도 모두 비린내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음식을 다시 먹지않았습니다. 도저히 비린내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입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어머니는 그 음식이 맛있다고 그 음식만 계속 드셨습니다. 저와 어머니의 취향이 왜 이렇게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밥과 녹차를 담은 그릇이 나왔습니다. 밥을 그 녹차에 말아서 먹는게 그 식당의 요리였습니다. 저는 그냥 된장찌개와 밥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녹차에 밥을 말아서 맛있게 드셨습니다. 저는 엄청 맛이 없을 것 같았는데 이해가 잘 안되었습니다.

녹차에 밥을 말아서 비린내가 나는 굴비와 함께 드시는 모습


그렇게 점심을 먹고 아버지는 강의를 하러 가시고 어머니와 저는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보려고 했던 영화는 '이끼' 라는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는 '강풀' 님의 만화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 처럼 '윤태호' 라는 만화가가 만든 '이끼' 라는 만화가 '강우석' 이라는 감독을 통해 영화로 만들어진 것 이었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둘 다 그 영화를 보고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따로 영화를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따로 영화를 보면 같이 여행을 온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제가 그냥 둘 다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보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영화는 '이클립스' 라는 영화였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무척 보고싶었습니다. 전 편인 '트와일라잇' 과 '뉴문' 을 아주 재미있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같이 그 영화를 보는데 어머니는 너무 영화가 지루해서 영화를 보는동안 주무셨습니다. 전 아주 재미있게 보았는데 어머니가 보기에는 이클립스라는 영화가 좀 유치했나 봅니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우리는 영화관 옆에 있는 서점에 들어갔습니다. 그 곳은 우리 마산과는 다르게 무척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곳은 우리 마산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은만큼 무지 넓었습니다. 어머니는 책을 하나 골라서 읽으셨습니다.

저는 그 동안 2학기 동안 공부할 책들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약간 출출해졌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돈을 받아서 우유를 사먹고 있는데 아버지가 강의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우리들은 다시 택시를 타고 이번에는 '유명회관' 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그곳은 소고기를 주로 하는 식당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아버지가 사주는 소고기를 배터지게 먹고 커피숍에 가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제가 옛날에 아주 재미있게 보았던 '화려한 휴가' 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도청 앞에도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여행을 끝내고 마산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배를 쥐어잡으시고 화장실로 뛰어가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화장시를 간 사이에 아버지와 잠시 버스 터미널에 있는 텔레비젼을 잠깐 보고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도 배가 아파왔습니다.

저는 일단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화장실은 그야말로 더럽게 멀었습니다. 저는 화장실로 한 걸음 한 걸음 뛸 때마다 배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한 단계씩 강하게 느겼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화장실에 도착하고 몸에 있는 노폐물을 비우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비워도 비워도 배가 계속 아팠습니다.

아까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급하게 먹는 바람에 장에 무리가 갔나봅니다. 그렇게 한참을 변기와 싸우던 중 드디어 복통이 사라지고 다시 아버지가 계시는 걸어가는데 어머니가 볼일을 끝내시고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타이밍이 맞았나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 동안 고생을 하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저는 버스를 타는동안 계속 잤습니다. 심지어 마산에 도착했을 때에도 제가 깨워서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어머니와 저는 아주 즐거웠겠지만 사실 아버지는 놀러간 것이 아니라 강의를 하러 간 것 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주 힘드셨을 것 입니다.

이렇게 피곤하신데도 어머니와 저에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사주시고 좋은 경치를 보여주신 아버지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 내일이면 유럽으로 출장을 가신 어머니께서 한국으로 돌아오십니다. 어머니께서 집에 안계신동안 저는 아버지와 늘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유럽으로 출장을 가신 첫 날 저와 아버지는 함께 맛있는 삼겹살을 먹고, 옛날식 도시락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바타라는 재미있는 영화도 봤습니다.

아버지와 삼겹살을 먹고 난 뒤 먹었던 옛날식 도시락.


둘째 날은 지리산에 가기위해 진주에서 함께 흑돼지 구이를 먹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하지만 셋 쨋날은 음... 그렇게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둘째 날 진주에서 먹은 흑돼지 삼겹살.


그 날은 아버지와 함께 지리산에 올라갔다가 해가 질 때까지 산을 내려오지 못해 세석 대피소에서 햇반과 차가운 햄, 그리고 참치를 먹었습니다.

억지로 먹었던 햇반과 참치, 햄.


햄은 그래도 꽤 먹을만 했는데 참치는 정말 맛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무사히 산을 내려와서 아버지와 함께 맛있는 백숙을 먹었습니다. 추운 산에서 내려와 먹는 백숙의 맛은 그야말로 최고였습니다.

저는 원래 백숙을 별로 안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때 먹은 백숙은 생각보다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집에서 쉬고있었습니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뒤 먹은 백숙.


그 날 저녁에는 아버지와 함께 또 삼겹살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먹은 삼겹살은 너무 기름기가 많아서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맛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별로였습니다. 부자지간에 입맛은 별로 닮지 않는 것 같네요;;; 그리고 다음날에는 주말이라 아버지께서도 회사를 안가셔서 그냥 집에서 라면같은 것을 끓여먹었습니다.

하지만 산에서 먹고싶었던 라면을 집에서 먹으니 그것도 꽤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먹고싶었던 라면을 먹어서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지리산에서 엄청 먹고 싶었던 라면.


그 주말이 지난 후에는 저와 아버지 모두 바빴습니다. 저는 학원을 갔고 아버지께서는 회사에 가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늘 저의 밥을 챙겨주셨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가시기 전에 언제나 저의 아침을 챙겨주시고 나가셨습니다. 그 동안 먹은 라면이 정말 한 박스는 되는 것 같네요.

아버지께서 직접 해주신 음식도 있습니다. 일단 어머니께서 출장을 가신 첫 날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밥도 직접 지으시고 맛있는 고등어도 구워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정말 요리를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지으신 밥의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요리를 해서 밥을 먹은 적도 있습니다.

저는 저번에 어머니께서 사두신 갈비탕을 끓여서 밥과 함께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3분카레도 해먹었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은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저녁에 아구찜을 먹으러 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매운 아구찜을 좋아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매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구찜을 먹을 때 마다 매워서 늘 잘 먹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어머니 없이 아구찜을 먹어서 오랜만에 맛있게 아구찜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대하던 아구찜이 나왔습니다.

저는 일단 콩나물부터 먹었습니다. 역시 저의 에상대로 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구찜의 고기를 먹어보니 엄청 질겼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질기셨던지 식당의 직원 아주머니께 지금 우리가 먹고있는 아구찜이  건아구찜이냐고 물었습니다. 직원 아주머니께는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우리는 부드러운 생아구찜을 시켰는데 왜 질긴 건아구찜이 나오냐고 했습니다. 직원 아주머니께서는 약간에 실수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그 질긴 건아구찜을 먹었습니다. 저는 너무 질겨서 콩나물과 밥만 계속 먹었습니다. 그래도 콩나물은 매콤한게 아주 맛있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어머니께서 돌아오시니까 어머니와 저 그리고 아버지, 이렇게 셋이서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번주 수요일(12월 30일)에 어머니께서는 유럽으로 떠나셨습니다. 어머니는 회사일 때문에 1년에 한 번씩 유럽으로 출장을 가십니다.

이제 어머니께서 유럽으로 가신지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네요. 어미니께서 집에 안계신동안 어머니와 함께 2010년 새해 첫 날도 같이 못보내고 아버지의 생신도 같이 못보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지리산에 함께 가서 2010년 새해 첫 날을 함께 보냈습니다. 아버지 생신에는 아버지께 꽃다발을 선물해 드렸죠.

제가 아버지께 사드린 꽃다발입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하긴 용돈을 만 원이나 사용해서 구입한 꽃다발인데 아버지께서 좋아하실만 하죠?

만약 어머니께서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슬슬 어머니가 보고싶어집니다. 어머니는 이번주 토요일에 오십니다.

아마 그 쯤 되면 어머니가 무척 그리울 것 입니다. 어머니께서 유럽으로 가실 때에 아버지가 내 밥을 잘 안챙겨줄 것 같다고 걱정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걱정과는 달리 아버지는 저녁에 는 일찍 들어오셨고 제 밥도 잘 챙겨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직이었던 날만 빼면 모두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어머니, 보고싶어요. 빨리 돌아오세요!
저번에 제 친구가 실수로 제 안경을 부러뜨린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친구는 안경값을 준다고 했었죠. 저는 안경을 결국 새걸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친구에게 안경값 10000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돈을 달라고 한 다음날 그 친구는 약속대로 돈을 들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들고있던 돈은 10000원이 아닌 5000원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저에게 5000원을 주면서 나머지 5000원은 내일 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에게 받은 5000원을 아버지께 돌려주면서 나머지 5000원은 친구가 내일 준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5000원을 주기 전에 생각했습니다. '분명 아버지는 5000원을 받으시고 나머지 5000원을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실꺼야.'

새로 구입한 안경.

부러진 안경 다리.


그리고 아버지께 5000원을 드리고 친구가 내일 나머지 5000원을 준다고 말씀을 드리자 아버지께서는 예상과 다르게 "친구가 그렇게 한데?"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예상이 빗나갔다는 생각으로 다시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 제가 뒤돌아 선 순간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머지 5000원은 친구한테 받지말고 그냥 그 친구랑 맛있는거 사먹어라." 저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나머지 5000원까지 받아낼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거의 15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그런 답을 예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다음날 저는 그 친구에게 가서 나머지 5000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는 돈은 이미 가져왔는데.. 하면서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저에게 과자를 사주며 안경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고 다시금 우정을 쌓아갔습니다.
이번에 '국가대표' 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재미있다고 해서 부모남과 본 영화였다. 과연 영화는 무지하게 재미있었다. 해운대와 비교해보면 솔직히 국가대표가 훨씬 더 재미있었다.

물론 해운대도 감동적이고 재미있기는 했지만 국가대표는 그 재미를 초월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멋진 영화였다.

국가대표는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금메달을 따서 한명은 아파트를 사기위해서, 한명은 돈을 벌기위해, 한명은 군대를 가지않기 위해서 '스키점프' 라는 종목을 연습하여 올림픽에 나가는 이야기를 가진 영화이다.

국가대표의 영화는 실화라고 한다. 물론 영화에서 꾸며놓은 부분도 있겠지만 영화에서 보여준 선수들의 열정과 노력은 절대로 꾸밀 수가 없는 부분이다.

영화는 2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상영되었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 만큼 영화가 화려하고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영화만 화려하다고 모두 대박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가 좋아야 영화의 화려함이 더욱 돋보인다.

어제 아버지께서 영화를 보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무리 멋지고 화려한 영상이라고 해도 스토리가 받쳐주지 않으면 전혀 화려하지 않다." 이 말씀은 결국 스토리가 재미가 없으면 그 영화는 이미 실패한 영화라는 소리이다.

그래서 이번에 개봉한 '트랜스포머2' 라는 영화는 화려하기는 했지만 스토리가 너무 없어서 흥행에 실패했다. 그런 영화의 대표적인 예로는 '디워' 를 들수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디워가 재미있었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너무 스토리가 재미없어서 다시 보고싶지는 않았다.

디워는 확실히 화려하고 멋진 영상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하다. 하지만 그 영화는 내용이 도통 뭔지 모르겠다.

영화에는 왜 이무기와 부라퀴가 용이 되려는지도 나오지 않고 부라퀴가 용이 되면 왜 큰일인지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설명만 기다리다가 그냥 괴물들이 싸우는 영상만 보다가 영화가 끝나버린다.

이번에는 영화 '괴물'과 국가대표를 비교해보았다. 괴물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최고의 영화라고 꼽히는 영화중에 하나이다. 나도 역시 국가대표보다는 괴물이 더 재미있었다. 하지만 국가대표도 괴물에 못지않은 재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요즘에 설경구라는 배우를 매우 좋아하고 있었다. 그는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에서 나를 놀라게 하고 이번에 해운대라는 영화에서 나를 한 번더 놀라게 했다. 하지만 어제부터 나는 하정우라는 배우도 좋아하게 되었다.
하정우는 추격자에서 범죄자의 모습으로 나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국가대표에 나와서 나를 감동시켰다. 지금 나에게 설경구와 하정우중에 누가 더 좋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하지 못 할 것이다.

나는 국가대표에서 어떤 선수에게 기자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자 그 선수는 '아버지'라고 대답했다. 그 선수의 아버지는 매일 자기 아들을 골프채로 때리면서 혼을 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아들은 존경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TV로 보고있던 그 선수의 아버지는 눈에 눈물이 맺히며 아들을 다시보게 된다.

나는 그 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원래 나는 영화를 보다가 눈물이 나는 성격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국가대표라는 영화는 나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앞으로 이런 감동적인 영화를 많이 봐야할 것 같다.

국가대표
감독 김용화 (2009 / 한국)
출연 하정우, 성동일, 김지석, 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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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집 장기입니다.                                                            
요즘 아버지와 장기를 많이 둔다. 원래 옛날에도 많이 했었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장기알을 많이 잃어버려서 다 버렸었다.

그래서 내 돈으로 장기판과 알을 다시 사서 이렇게 장기를 두고 블로그를 쓴다.
 
우리 아버지는 장기를 잘 두신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장기를 할 때 5판 정도 해서 1번 이길까 말까 하는 정도이다.

저번에 할아버지댁에 갔을 때 아버지와 장기를 두어서 내가 이겼다. 그래서 내가 장기를 꽤 잘 두는 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잘 두신다.

물론 아버지보다 잘 두시는 분도 있다. 그 분은 바로 고모부이시다. 고모부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장기를 잘 두신다. 저번에 할아버지댁에 갔을때 고모부와 장기를 두었는데 왕만 빼고 모조리 잡아 먹혔다. 그 때는 정말 입이 쫙 벌어졌었다.

그 때는 정말 손도 못 써보고 단번에 져버렸다. 물론 아버지도 잘 하시지만 고모부는 심하게 잘 하신다. 아마 고모부보다 훨씬 장기를 잘 두시는 고수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 분들 만큼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아버지를 이겨보고 싶다. 물론 아버지를 이긴 적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한 판도 못이기고 있다.

아마 아버지께서도 나를 이기기 위해서 몰래 연습을 많이 하시는 것 같다. 나는 아버지께 거의 매일 지지만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내 실력이 많이 나아지고 있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신다. 그 칭찬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조금만 있으면 아버지와 대등하게 장기를 둘수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러니까 장기를 잘 두시는 분들은 장기를 잘하는 팁을 좀 가르쳐주세요 그러면 그 팁을 참고해서 아버지를 이기고 나서 장기에 대한 글을 한번 더 올려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께요. 물론 댓글로도요

우리 아버지는 옛날부터 여자처럼 머리를 묶어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어느 때 부터 머리를 엄청 길러서 제가 사준 끈으로 머리를 묶으시더군요.

그런데 그 때는 아직 머리를 묶기에는 머리가 짧아서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머리가 잘 안묶어진다고 경험자가 요령을 가르쳐 달라고 막 하시던데….

그런데 이제는 머리를 꽤 길러서 완전히 보기좋게 묶으셨더군요.

물론 여자와 남자를 구별하는 것은 안되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머리가 조금 웃기네요. 하여튼 아버지 머리묶기 성공하신 거 축하드려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이지요.

저도 지금은 안되지만 나중에는 머리를 길러서 아버지처럼 머리를 한번 묶어볼랍니다.

그러면 제 아들도 이렇게 글을 올리겠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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