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는 학교에서 치르는 중간고사 때문에 블로그에 잠시 소홀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험을 다 치르고 나서 포스팅을 한 번 해봅니다.

시험은 정확히 어제(10월 8일 금요일)에 끝났고 오늘은 간만에 쉴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역시 일정이 있었습니다.

제가 오늘 일어난 시간은 아침 11시정도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랜만에 인터넷을 보다가 씻고나서 집을 나섰습니다.

토요일 아침부터 제가 간 곳은 창원이었습니다. 오늘은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학생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였고, 저는 태봉고의 대표로 그 자리에 나갔습니다.

사실 대표랄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모임을 열었는데 대안학교인 태봉고 학생들의 의견도 듣고싶어서 태봉고에서 몇 명 정도만 참석한 것 입니다.

저는 같이 태봉고를 다니는 친구와 이렇게 두 명이서 그 모임에 참가했습니다. 그 모임에는 많은 단체가 참석했습니다.

우선 대안학교인 저희 태봉고와 산청의 '간디학교' , '청소년 참여위원회' , YMCA 등 학생 인권에 관련된 여러 단체들이 모여 총 25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인권에 관한 간단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학생인권이 왜 필요한가?, 학생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활동을 해야하는가? 대충 이런 주제의 강의였는데, 재미있어서 학교수업보다 더 열심히 들었습니다.


강의를 하신 선생님께서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생각할 때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들의 인권도 지켜져야 한다고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학생인권에 관련된 여러 활동을 하면서 학생들의 인권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지만 교사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교사들이지만 결국은 교사들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섣불리 학생들의 자유을 보장해주는 학생인권조례를 대충 만들었다가 학생들의 반항으로 인해 교사들이 피해를 당한다면 그것은 교사들의 인권까지도 침해당한 것 입니다.

그래서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사들의 인권까지도 고려해서 더욱 신중하게 학생인권에 대해 토론하고, 더욱 더 신중하게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생각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인권에 대한 강의를 듣고나서는 본격적으로 학생들끼리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각 단체별로 지금까지 학생인권에 관해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쉽게도 저희 태봉고등학교는 학생인권에 관한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잠시만 YMCA의 회원으로써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각자 오늘 열린 모임에서 앞으로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오고갔으면 좋겠는지 의견을 냈습니다.

저랑 같이 온 친구는 이번 모임에서 학생인권조례에 올라와있는 인권조례들 중에서 바꿔야할 것과 추가되야 할 것에 대해 토론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잘 모르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학생인권조례를 알리고 홍보하는 방법에 대한 회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저도 거기에 동의했습니다. 오늘 토론회에 참가하기 전부터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게 바로 학생인권조례에 우리 의견을 추가시키고, 학생인권조례를 홍보하는 것 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한 단체에서 자신들이 학교에서 인권을 침해당하는 여러가지 사례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공감하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태봉고의 학생들과 간디학교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인권을 침해당하는 체벌에 대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학생들에게 많은 자율을 주는 대안학교에서 생활하다보니 이미 학생들이 체벌당하는 일이 먼나라의 일처럼 느껴질 것 입니다.

그리고 저의 입장이 아닌 태봉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에 진학하고 있는 학생의 입장에서 저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태봉고에서는 학생들에게 최대한 많은 자유를 주려고 하고있지만 학교에서 누리게 해주는 자율을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방황하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안학교에 진학하고 있는 저로서는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든 안되든, 어차피 충분히 자율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별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에 학생들에게 자율적인 학교생활을 하게 해주는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져서 우리 학교의 학생들처럼 자율을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학생들이 생길까봐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학생들이 참여하여 학생인권조례 대해 더 고민하고 생각해서 그런 문제점들을 모두 보완할 수 있는 인권조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자율에 적응을 못하는게 두렵다고 해서 학생인권조례를 학생들이 포기한다면 학교에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는 학생들은 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태봉고에 다니는 학생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최대한 다른 모든 학생들의 입장까지 고려해서 토론에 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의 회의끝에 이 모임은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지기로 했고, 앞으로의 모임에서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나눌지를 대충 정했습니다.

오늘 대안학교의 학생의 입장으로써 학생인권에 대한 모임에 참가하면서 느낀게 참 많습니다. 제가 다른 학교의 학생들에 비해 얼마나 많은 자율을 누리면서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게 되었고, 다른 학교의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는지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모임을 통해 앞으로 학생인권에 대한 어떤 활동을 해야하며 그런 활동들을 통해 우리 학생들이 단합해서 여러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이제 지리산에 관한 마지막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지리산에 다녀온지도 벌써 일주일에 되어가네요. 이번에 다녀온 지리산도 점점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겠죠?

그래서 이렇게 글이라도 적어보는 것 입니다. 작년에 아버지와 지리산에 갔을 때에는 몸도 너무 힘들고, 식량도 없는 등의 이유 때문에 천왕봉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드시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 에 가기로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30km 라는 엄청난 거리를 종주하다보니 제 몸은 점점 지쳐갔습니다.

결국 천왕봉의 바로 밑인 '장터목 대피소' 에서 천왕봉까지 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도저히 제 몸으로는 천왕봉까지 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머릿속에 '빨리 집에 가서 치킨 시켜먹어야지.' 라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왕봉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코스의 다른 조들도 모두 천왕봉을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30km를 걷고나서 천왕봉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정말 무리일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장터목 대피소에서도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마시고 제 눈에 바로 들어온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름' 이었습니다. 장터목 대피소가 워낙 높은 곳에 있다보니 구름이 바로 눈앞에 있었습니다. 확실히 지리산의 경치는 다른 산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장터목 대피서에서 본 구름이 움직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처럼 새하얀 구름은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비록 천왕봉까지는 가지 못했더라도 지리산에 가서 보고 느낀 것은 충분히 많았습니다. 화엄사에서 출발해서 중산리까지 간 것 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장터목 대피소에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천왕봉 바로 밑에 있는 대피소이기 때문에 가장 인기있는 대피소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장터목 대피소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고나서 우리는 바로 중산리를 향해 내려갔습니다. 빨리 집에 가고싶다는 생각에 그 험한 내리막길을 엄청난 속도로 뛰어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중산리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다시 태봉고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모두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갑자기 같은 조였던 지우라는 친구가 치킨을 사준다고 했습니다.

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치킨을 시켜먹었습니다. 지리산에 다녀와서 바로 시켜먹는 치킨의 맛은 그야말로 환상이었습니다.


'그 치킨을 지리산에 먹었더라면 더 맛있었을텐데...' 이런 아쉬운 생각도 많이 들었지만 그 때는 치킨이 너무 맛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앞으로 1년뒤에 또다시 학교에서 지리산 등산을 가게됩니다.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쉬운 코스로 가서 정말 반드시 천왕봉을 가볼 것 입니다.

웬만하면 새벽에 출발하여 천왕봉에서 일출을 볼 수 있는 코스를 갈 것 입니다.

저번부터 계속 언급했듯이 작년 겨울에 지리산 갔을 때와 이번에 지리산 갔을 때, 지리산의 모습은 정말 달랐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계절때문이겠죠. 겨울과 여름은 계절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기때문에 지리산의 경치또한 심하게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역시 작년에 갔을 때 봤던 곳이 기억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작년 지리산에 가서 춥고, 힘들고, 배고프고, 피곤했던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나 봅니다.

하지만 기억에 전혀 없는 장소도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작년과는 전혀 다른 코스를 갔기 때문입니다. 훨씬 더 길고 훨씬 더 힘든 코스를 이번에 갔습니다.

작년에는 지리산에서 총 13km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무려 35km 가까이 걸었습니다. 우리들은 화엄사에서 출발했는데 지리산을 쭉 돌아서 장터목까지 간 다음, 중산리로 내려왔습니다.

일정을 조금 세부적으로 적자면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4시간정도 걸려서 올라갔습니다. 거기에 가서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그냥 놀았습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그냥 말뚝박기나 닭싸움, 팔씨름 같은 놀이를 하며 육체적으로 힘들어가면서까지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리고는 수육을 다같이 먹고 모두들 다 잠이 들었습니다. 저도 피곤해서 그날 밤 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대피소에서의 잠자리가 많이 불편했던지 금방 깨고말았습니다.

잠이 들기 직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잠에서 깨어나자 시간은 겨우 새벽 3시..... 잠도 안오고 그냥 그 자리에서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짐도 다 싸고나니 더이상 할게 없었습니다.

짐을 다 챙겼다고 해서 먼저 출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는 가방을 들고 대피소밖으로 나갔습니다. 대피소 밖은 너무나 추웠습니다. 마치 겨울의 추운 날씨를 연상시키듯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자 아름다운 별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저는 얼른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들어 하늘을 향해 셔터를 눌렀습니다.

하지만 카메라의 성능때문인지 저의 사진찍는 실력 때문인지 별의 모습은 전혀 찍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쉽게도 그 때 봤던 별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결국 별사진을 찍는건 금방 포기하고 아침밥을 미리 준비하러 취사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한 선배가 미리 일어나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선배에게 초콜릿을 요구했습니다. 확실히 우리 학교는 인심이 좋아서 초콜릿을 금방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거의 30분동안 초콜릿만 먹었습니다.


산에 오니까 평소에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던 초콜릿을 많이 먹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초콜릿을 먹으면서 초콜릿을 준 그 선배와 초콜릿에 대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 선배의 말로는 초콜릿을 많이 먹으면 분명히 두뇌회전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일시적으로 좋아지지만 그 만큼 뇌가 빨리 노화된다고 했습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결론은 초콜릿이 몸에 해롭다는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선배의 충고도 저의 초콜릿 사랑을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30분동안 초콜릿을 '흡입' 하고나서 바로 아침밥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조의 모든 멤버들과 함께 아침밥을 먹고나서 바로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등산이라기보다는 지리산의 능선을 타고 걷는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르막 내리막이 계속 반복되어서 꽤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내리막도 많이 있어서 생각보다 쉽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하천 대피소라는 곳에 도착을 했습니다. 거기까지 도착하는데 물이 모자라서 고생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연하천 대피소에는 바로 눈앞에 식수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식수대가 마치 천국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 식수대에서 물을 실컷먹고 또다시 조의 멤버들과 점심을 먹은 뒤, 바로 출발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걸어서 도착한 곳은 바로 '세석대피소' 그곳은 제가 인생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장소입니다. 세석대피소는 작년 겨울, 아버지와 지리산에 갔을 때 하룻밤을 묵었던 곳입니다.

아버지와 밤늦게 추운날씨와 싸우며 금방이라도 부숴질 것 같은 지친 다리를 이끌며서 거의 죽기 직전에 세석 대피소가 보였을 때 저는 이제는 살았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감정이 북받쳐서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게 벌써 작년 겨울의 일이 되버렸네요. 정확히는 작년 1월 1일의 일이니까 일년도 훨씬 넘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세석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그 때의 감동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세석 대피소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한 번 자봤던 대피소라 그런지 세석 대피소에서는 간만에 편한 마음으로 잘 수 있었습니다.

이번 지리산 등산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2박3일동안 조끼리 직접 밥을 해먹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리산에 가기 전 밥을 해먹을 음식을 잔뜩 구입했습니다.

작년 아버지와 함께 지리산에 갔을 때에는 아무런 식량도 가지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대피소에서 비싼 값에 음식을 구입해먹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모든 음식을 다 챙겨가서 직접 요리를 하고 밥을 먹은 뒤 직접 전부 치워가야만 했습니다.

원래 등산이라는게 그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조는 조의 이름부터 '밥먹으로 가' 조 라고 짓고 음식을 잔뜩 준비해갔습니다.

비록 가방이 무척 무거워서 고생을 했지만 음식이라는게 먹으면 없어지기 때문에 가방의 무게는 점점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힘차게 등산을 했습니다.

첫 날의 아침밥은 학교에서 급식으로 먹고 점심 때 쯤 지리산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역시 등산을 하자마자 배가 고파졌고, 점심을 선생님께서 챙겨온 김밥으로 대충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힘들게 등산을 해서 대피소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바로 요리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가 저녁 때 먹을 음식은 바로 '삼겹살' 이었습니다.


선배가 무거워도 열심히 들고 온 삼겹살을 드디어 먹게 되었습니다. 가져 온 버너는 제 버너를 합쳐서 총 세 개, 한 개의 버너로는 밥을 했고, 나머지 두 버너로는 고기 굽는데에 풀가동했습니다.

어느새 고기는 다 익어가고, 우리 조는 밥과 삼겹살에 쌈장과 상추, 고추, 마늘 등을 곁들어 산에서는 보기 힘든 푸짐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얼마나 저녁밥을 많이 먹었던지 이제는 토가 나올정도로 배가 불러지자 저녁식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몇시간 동안 대피소에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말뚝박기, 닭싸움, 팔씨름 등 정말 체력을 심하게 낭비하는 놀이만 했습니다. 첫날이라 그런지 아직 많은 학생들이 힘이 넘쳐보였습니다.


그래서 다들 힘차게 놀았습니다. 한바탕 놀다보니 또다시 배가 고파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조의 선생님께서 다시 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이번에 먹는 고기는 바로 '수육' 이었습니다. 구워먹는 삼겹살과는 또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수육을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을 위해 정성스레 삶아주셨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많다보니까 수육은 금방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산에서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저는 새벽에 일어나서 미리 요리준비를 했습니다. 제가 아침 당번은 아니었지만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그냥 먼저 요리준비를 했던 것 입니다.


둘쨋날의 아침 메뉴는 '전투식량' 이었습니다. 컵라면과 비슷하게 그냥 뜨거운 물을 붓고 몇 분 기다렸다가 먹으면 되는 간단한 음식이었습니다.

무슨 짬뽕맛이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더럽게 맛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음식또한 산에서 먹는 음식 치고는 아주 만족스러운 음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다시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걷고나서 또다시 점심밥을 먹는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우리조는 한 대피소에 들려서 요리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제일 많이 먹어야하는 둘쨋날의 점심밥, 2박 3일의 중간에 위치한 이 시기에 먹는 밥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조가 먹는 음식은 바로 '라면' 이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라면으로는 제 체력을 보충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제 눈에 보인 뭔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라면보다 몇 배로 좋아하는 음식인 '짜파게티' 였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선생님께서는 짜파게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우리조는 음식을 많이 가져온 조답게 라면과 짜파게티를 둘 다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렇게 짜파게티를 싹싹 긁어먹고 다시 출발했습니다.

약 21km를 걸어서 둘쨋날의 목표지점까지 도착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바로 요리준비에 돌입했습니다. 배가 많이 고팠기 때문에 빨리 먹을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뜨거운 물에 데우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육개장이었습니다. 게다가 각종 덮밥까지 만들어먹으니 정말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둘쨋날의 저녁밥까지 모두 해결하고나서 둘쨋날에는 피곤했는지 꽤 편하게 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날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마지막날에는 집에 빨리 가고싶은 마음에 그냥 참치캔 몇개로 아침을 해결하고 얼른 출발했습니다. 다음 대피소에 도착해서 우리조는 마지막 점심밥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음식을 모두 꺼내서 전부 요리해먹었습니다. 남은 육개장들과 참치, 라면, 밥, 햄 이 모든 음식을 먹고나니 부실했던 아침까지도 모두 해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등산을 가서 직접 요리를 해서 밥을 먹어보니 느낀게 참 많습니다. 우선 산에서는 집에서처럼 배고파서 밥을 먹는 개념이 아닙니다.

산에서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먹기보다는 '살기위해' 밥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요리하는데 더 필사적으로 열심히 할 수 있었고 먹는것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먹는 음식은 맛도 달랐습니다. 보통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기름기가 너무 많아서 그렇게 많이 먹지 못하는데 이번 지리산에서는 한개라도 더 많이 먹으려고 노력까지 했습니다.

정말 햄 하나까지도 최고급 요리처럼 느껴졌고 물 한모금까지도 한잔의 포도주처럼 달콤했습니다. 그게 바로 산이라는 곳입니다.

산에서는 모든게 맛있고 모든게 소중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음식들이 지리산에서는 얼마나 맛있던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가끔 제가 정신이 약해지고 음식을 소중이 여기지 않으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을 때 다시 산에 간다면 그런 정신들이 돌아올 것 입니다.
이번에 갔던 지리산 등산은 아주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작년 겨울에 아버지와 지리산을 갔을 때가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아버지와 갔을 때에는 13km밖에 걷지 않았고 이번에 학교에서 지리산을 갔을 때에는 30km나 걸었지만 역시 아버지와 지리산을 갔을 때가 훨씬 힘들었던 것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갔을 때에는 날씨가 춥지않았고 식량도 풍부했지만 아버지와 갔을 때에는 겨울이라 눈이 엄청 쌓여있었고 추웠으며, 식량도 없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지리산을 조금 쉬엄쉬엄 갈 수 있었지만 그래도 짐이 너무 무거웠고, 거리도 너무 길어서 다리와 발이 너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다리와 발에 생기는 근육통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지만 제 주위에 있는 지리산의 아름다운 경치 덕분에 힘을 내서 계속 걸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힘든 여정이라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을 수는 없었지만 기억에 남을 정도로 멋진 곳은 전부 찍어두었습니다.

지리산은 겨울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지리산이 눈으로 덮혀있어서 그 내면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가을에 오니까 더 멋졌던 것 같습니다.

특히 겨울에는 얼어서 볼 수 없었던 지리산의 흐르는 시냇물들이 정말 멋졌던 것 같습니다. 엄청나게 큰 바위들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볼 때면 피곤에 찌든 제 몸과 마음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아직은 초가을이라 단풍이 들지않은 초록빛의 나뭇잎들이 왕성하게 자라있는 나무들 사이로 걷다보니 제 눈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눈때문에 미끌어질 것 같아서 올라가보지 못했던 큰 바위에 올라서보니 지리산의 넓은 모습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그 멋진 모습에 저는 힘든 것도 잊어버리고,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들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는 카메라를 들고오지 않아서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사용했지만 이번에는 제가 찍은 사진만 사용할 것 입니다. 


겨울산의 찬공기가 아닌 지리산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딱딱한 아스팔트가 아닌 지리산의 멋진 산길을 걸으면서 마치 제 몸의 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난생 처음 제가 건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제 몸의 피가 온 몸을 돌면서 혈액순환하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만큼 지리산은 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고 작년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저에게 전혀 다른 감동을 남겨주었습니다.

확실히 제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경치를 제가 직접 제 카메라고 찍고, 글을 쓰는데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을 사용하면 그 때가 더욱 잘 생각나서 글이 더 잘 써지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여행이나 등산을 가면 직접 사진을 찍는게 제일 좋다고 하셨는데 이제야 아버지의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여행이나 등산을 가게된다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제가 직접 사진을 찍고 그 멋진 풍경을 기억할 것 입니다.
9월 22일(목)부터 24일까지 학교에서 가는 이동학습에 참가했습니다. 저희가 간 곳은 바로 '지리산' 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지리산으로 갈 때 코스 난이도를 상, 중, 하로 나눠서 갔는데 저는 남자기 때문에 가장 힘들 것이라고 예상되는 상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캠프를 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봤고, 아버지와 등산도 충분히 해봤으며 지리산도 한 번 가봤기 때문에 이번 이동학습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리산은 각 코스에 몇 개의 조를 짜서 가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제가 속한 조는 총 7명으로 담당 선생님은 기숙사의 사감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선생님께서는 체육을 전공하셨고, 등산도 많이 다녀보셔서 아주 든든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걱정없이 등산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조에서 저는 '코펠' 과 '버너' 를 들고오기로 했습니다. 제 아버지가 등산을 많이 좋아하셔서 왠만한 등산장비는 모두 집에 있었습니다.

제가 들고 간 버너입니다.


그렇게 준비한 짐을 챙겨서 선생님께 검사를 맡으러 갔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제 짐을 보고는 깜짝 놀라셨습니다.

우선 제 가방이 너무나도 작다고 했습니다. 우리집에 있는 등산 가방중에서 그나마 가장 큰 가방을 가지고 온건데 작다고 하니까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져 온 코펠도 너무 작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코펠을 들고오기 전에 작은 코펠이라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도 지금와서 작다고 하니까 또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께 짐에 대해 실컷 잔소리를 들은 뒤 저는 짐을 처음부터 다시 싸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먼저 등산용 가방부터 새로 샀습니다.

저번 가방보다 훨씬 큰 가방을 구입했고, 친구에게 부탁해서 큰 코펠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리고 카메라까지 챙기고보니 가방을 들고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무거워졌습니다.

아버지가 새로 사주신 등산 가방입니다.


그렇게 짐을 다시 챙기고도 저는 지리산 준비를 하면서 계속 허둥지둥해야 했습니다. 정말 제가 생각해도 필요없을 것 같은 것들을 선생님과 다른 조원들은 계속 챙기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람막이 2겹과 각종 반찬들, 쌀, 모자, 장갑 이런 것들은 제가 생각하기에 지리산에 가서 정말 필요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과 계속 분쟁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른 조원들도 작년에 지리산을 한 번 가봤다고 저를 계속 무시하면서 그런 짐들을 계속 챙기라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조에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지리산에 가기 전까지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 친구까지도 지리산 준비로 시비를 걸어서 그 친구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결국에는 지리산에 가서 바람막이는 한 개밖에 필요하지 않았고, 반찬은 너무나도 많이 남았으며, 쌀도 엄청 남아서 힘들게 들고왔습니다.

또한 모자나 장갑은 정말 필요도 없었으며 새로 산 가방은 공간이 너무 많이 남았고 괜히 가방이 너무 커서 무겁기만 했습니다.

저는 제 또래들 중에서 제가 여행을 가장 많이 가봤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산도 아버지와 함께 많이 가봐서 충분히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에서 나오는 제 의견은 거의 다 무시되었고 오히려 혼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리산을 다녀오고 나서야 제가 힘들었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학교에서 가는 지리산 등산은 저 혼자만 잘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서로 의지하고 이해해줘야만 했습니다.

저도 너무 제 의견만 앞세웠다는 것을 느꼈고 이번 지리산 등산은 저 혼자 가는게 아니라 저희 조의 총 7명이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에 제 의견이 무시되더라도 절대로 기분 나빠해서는 안되는 것 이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공동체 의식이라는 것을 배웠으니 내년에 가는 지리산 등산은 더 완벽한 준비를 해서 갈 수 있을 것 입니다.

저희 조의 일부 멤버들입니다.


내 고정관념을 깨준 청소년 합창페스티벌

 

요즘 우리 학교에서 1학년 남학생들끼리 학교 행사를 할 때 뭘 할지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합창을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동의했고 거의 합창을 하자는 분위기로 가고있습니다. 그래서 합창을 해서 무슨 노래를 부를지 정해야 했습니다.

그 때 한 친구가 아이돌의 노래를 부르자고 했습니다. 저는 단호히 안된다고 했습니다. 저의 사고에서는 합창에서 아이돌 노래를 부르는건 전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또 다른 한 친구가 랩을 하자고 했습니다. 랩 또한 합창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친구' 를 주제로 한 노래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합창에서 아이돌 노래와 랩을 하면 안된다는 저의 고정관념을 깬 무대를 보았습니다. 바로 어제(9월 17일) 창원에 가서 관람했던 청소년 합창 페스티벌입니다.

거기에 참가했던 고등학교 합창부들은 아이돌 노래로 합창을 했습니다. 티아라의 '롤리폴리' 라는 곡이었는데 합창 단원들이 단체로 복고풍의 옷을 입고, 춤을 추며 아이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음 팀은 아예 대놓고 합창 단원들 중 한 명이 무대 앞으로 나와 랩을 했습니다. 랩을 하는 한사람만을 띄워주는 게 합창은 아니지만 정말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몇몇의 학생만 무대 앞에서 랩을 하고 노래를 했지만 뒤에 남아있는 학생들은 마이크가 없이도 목소리를 내며 멋진 배경음을 만들어내어 노래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팀이었던 마산고등학교의 합창부는 그냥 '아이돌 노래 메들리' 를 불렀습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아이돌의 노래를 합창으로 부를 수 있는지...


아무래도 신세대들이기 때문에 합창에서 랩과 아이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학생들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합창에서 랩과 아이돌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이번 기회를 통해 랩과 아이돌의 노래도 음악적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고 합창이라는 문화에도 충분히 어울리는 노래라는 것을 알게된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랩과 아이돌에 대해 무조건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가 변할 때마다 유행도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유행을 이끌고 있는게 바로 요즘 학생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학생들의 젊음과 열정으로 항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여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런 학생들의 새롭고 멋진 도전을 인정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노래하고 춤을 추면 무조건 딴따라라고 할 게 아니라 지금은 그들이 끼와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돌의 노래도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혀 이미 전세계에서 대중성을 충분히 인정받았습니다. 저도 합창을 할 때에는 랩이나 아이돌 노래를 하면 안된다는 고정관념을 깰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오늘 학교를 다녀와서 오랜만에 집에서 푹 자고일어나니 아버지가 창원에서 열리는 합창 페스티벌에 가자고 하셨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지 얼마안되서 몸이 매우 피곤했지만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쓸 소재가 생길 것 같아서 잠을 깨기위해 아이스크림을 한 개 물고 창원으로 출발했습니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창원 KBS홀 옆에 있는 큰 건물이었는데 공연을 많이 하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합창 페스티벌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건물은 합창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고등학생들과 관람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공연은 5시에 시작되었는데 5시가 되자 관객석은 금방 꽉 찼습니다.


합창 공연이 시작되기 전, 관객들에게 잠깐 짧은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영상에는 이번 고등학교 합창 페스티벌을 축하해주는 메시지가 담겨있었습니다.

경남교육감과 창원시장 등 많은 사람들이 이번 합창 페스티벌을 축하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영상에는 현재 '남자의 자격 : 청춘 합창단' 을 이끌고 있는 유명한 사람의 축하 메시지도 있었습니다.

영상의 마지막에는 남자의 자격의 멤버이자 부활의 기타리스트인 '김태원' 등장했습니다. 관객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김태원 같은 연예인을 섭외하다니 정말 대단했습니다.

기타리스트 김태원은 남자의 자격에서 청춘 합창단을 하고있고 음악가로써 이번 합창 페스티벌에 대해 좋은 말들을 해주었습니다.  저도 나중에 PD가 되면 김태원처럼 멋지고 유명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많이 하고싶습니다.


잠시후 공연이 시작되었고 페스티벌에 참가한 첫 팀이 나왔습니다. 합창 공연을 하는 팀은 총 5팀이었는데 모두 고등학교의 합창부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공연한 팀은 창원중앙여자고등학교의 합창부 팀이었습니다. '하나가 되어 부르자' 라는 처음 들어보는 노래를 불렀는데 화음이 정말 멋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외국노래도 두 곡 더 불렀는데 그 팀은 노래가 정말 좋았습니다. 물론 노래를 하면서 간단한 춤도 보여주었지만 안무보다는 노래가 멋진 팀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고등학교의 합창부들의 노래도 정말 멋졌습니다. 너무 춤만 춰서 합창이라는 주제를 벗어났던 팀도 몇 몇 있었지만 모두 노래는 잘 불렀습니다.

저 또한 중학교를 다니는 3년동안 계속 합창을 했었지만 저희 중학교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목소리 자체로도 실력차이가 많이 났고 안무나 단합 등 모든 분야에서 저희 중학교를 뛰어 넘었습니다.

정말 전문적으로 합창을 하는 사람들처럼 모든 팀들이 노래로써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말고도 합창 페스티벌에 참가한 각 고등학교의 합창부 학생들은 공통점이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합창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 행복해 했다는 것 입니다. 고등학교 시절은 한창 입시공부에 스트레스가 많이 생길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이 하고 싶은 합창을 하면서 실컷 노래를 부르면 학생들의 스트레스가 많이 해소될 것 같았습니다.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만 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대안학교에 진학하고 있어서 입시공부에 그닥 스트레스를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조금만 있으면 저도 입시를 준비해야 하고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있습니다.

저도 그 때가 되면 충분히 입시 공부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입니다. 그러면 저도 합창 페스티벌에 참가한 학생들처럼 제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스트레스 해소가 필요하겠죠.

어쩌면 오늘 합창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이미 힘든 학교생활를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발견한건지도 모릅니다.

이번주 토요일에는 학교에서 전일제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4교시 내내 계속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 입니다. 저는 '그글' 이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그글이라는 동아리는 그림과 글을 창작하는 동아리인데, 저는 주로 글을 많이 썼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국어 선생님께서 주제를 하나 던져주셨습니다.

'선택' 이라는 주제였는데 학교 소식지에 담을 글을 우리 동아리에서 적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선택' 이라는 것을 주제로 글을 한 편 적어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인생에서는 보통 ‘선택’ 이라는 것을 많이 경험해 볼 것이다. 옛 말에 ‘매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미 인생에서 선택이라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나도 16년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겪어보았다. 내가 다니는 ‘태봉고등학교’ 도 수많은 고민과 선택을 거쳐서 진학을 결정한 것이다. 현재 내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는 사교육으로 썩어 빠진 한국사회에서 ‘대안학교’ 라고 불리우는 고등학교다.

태봉고등학교에 걸려 있는 그림과 글.


내가 알고있는 한, 대안학교는 보통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안적인 교육을 추구하는 학교이다.

나는 보통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강제적인 교육과 학생의 인권을 무시하는 교육에 반대하고, 나에게 어울릴 것 같은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교육을 기대하여 태봉고등학교를 선택하였다.

다행히 태봉고등학교의 교육방식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학생의 입장으로써 학교의 교육방식을 평가 하는 게 건방질 수도 있지만 내가 평가하기로는 태봉고의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교육은 아주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기대하던 자율적, 대안적인 교육 말고도 또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 바로 ‘LTI 수업’ 이다. 사실 LTI 수업이라는 것이 태봉고등학교에서는 많이 활성화되어 있었지만 태봉고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LTI 수업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처음 태봉고등학교를 찾아간 날.


어쨌든 LTI 수업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선생님이 해주는 수업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멘토를 찾거나 스스로 할 일을 찾아 하는 것이 LTI 수업이었다. 그리고 그 LTI 수업을 할 때에도 수많은 선택을 거쳐야 한다. 특히 멘토 선생님을 정할 때 많은 선택을 했었다. 나에게는 방송에 관해 가르쳐주시는 멘토 선생님이 두 분 계셨는데 바로 방송국의 PD로 일하고 계시는 전우석 PD님과 광고사에서 일하고 계시는 윤종원 카메라 감독님이다.

LTI가 두 개나 되다보니까 LTI 시간에 둘 중 누구를 찾아갈지를 결정하는 것도 꽤나 큰 고민이었다.

결국에는 방송국으로 LTI를 나갔지만 아직까지도 ‘방송국으로 LTI를 나갔던 그 선택이 과연 잘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이렇게 내가 경험한 선택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수많이 겪어왔다. 지금까지 겪었던 선택을 모두 적는다면 끝도 없이 적을 수 있을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학생 때 진로를 결정할 때 선택을 많이 하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도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대학을 가서 어떤 과에 들어갈 것인가?, 어떤 직장에 취직해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이것 또한 계속 적는다면 끝도 없이 적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글을 쓰고 있는 지금고 계속 선택을 하고 있다. 어떤 단어를 적어서 어떻게 문장을 끝낼 것인가?, 어떤 내용으로 글을 이어나갈 것인가? 이렇게 인생에서는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리고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선택도 있다. 그 선택으로 인해서 자신의 인생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비록 선택이 자신의 인생에서 많이 어렵지만 절대로 선택을 두려워 하지마라! 또다시 옛말을 하나 인용하자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이 있다. 그 말 그대로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는게 좋다. 인생에서의 중요한 선택은 웬만해서는 피할 수 없다.

그 선택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피하지도 마라 매순간의 선택을 즐길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미 즐거운 인생이 된 것이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가 개학한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네요.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어쨌든 학교가 개학하니까 확실히 모든게 새로웠습니다. 학교 시설도 조금씩 바뀌고 친구들의 모습도 조금씩 바뀌어 있었습니다.

물론 제 모습도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태국에 갔다온 뒤로 제가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학교에 오니까 역시 제일 반가웠던 것은 친구들과 선생님들이었습니다. 학생들과 선생님들 모두 금방 정상적인 학교생활로 돌아갔습니다.

노래를 하고싶은 친구들은 노래연습을 하고 밴드를 하고싶으면 밴드부를 하고, 책을 읽고싶은 학생들은 책을 보며 공부를 하고싶은 학생들은 공부를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자기가 하고싶은 활동을 해나갔고, 각자의 꿈에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개학을 하자마자 바로 방송부 활동을 했습니다.2학기 때부터는 방송부에서 한 달에 한 번 학교 영상을 제작하기 때문에 매우 바빴습니다.

저는 방송부에서 촬영을 맡았는데 아직 영상편집이 미숙해서 아쉽게도 편집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촬영을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의 일주일에 걸쳐 모든 촬영을 끝내고 영상 한 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렇게 영상을 다 만들고나니 뿌듯한 마음이 많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방송부말고는 특별히 하는게 없었습니다. 만날 촬영만 하고 편집때문에 컴퓨터만 보고있으니까 일종의 스트레스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뭔가를 찾던 도중 농구라는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농구는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스포츠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학교가 사용하는 농구공


농구 동아리의 회장을 제가 맡고 있었고 시간이 나면 친구들리 모여서 농구를 하며 많이 놀았습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만날 방송부 일만 하고, 공부만 하면 뭐합니까? 학생이라면 역시 체력이 있어야겠죠. 그래서 선택한게 농구라는 운동이었습니다.

사실 평소에도 농구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학교는 농구를 좋아하는 학생이 많이 없었기에 농구를 할. 친구들을 모으는게 항상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농구를 할 때 농구를 할 친구들을 모을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농구를 아예 학교의 수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입니다.

우리 학교에는 '방과후 수업' 이라는게 있습니다. 축구, 요리, 영어, 작곡, 밴드연주 등... 여러가지 방과후 수업있었습니다. 하지만 농구 방과후 수업은 없었습니다.

우리학교의 농구 골대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냥 체육 선생님께 말씀 드려서 농구 방과후 수업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뱡과후 신청서 몇 개를 작성하고, 농구부 멤버들끼리 회의를 했습니다.

그런 절차들을 모두 거쳐서 드디어 농구 방과후 수업이 만들어졌습니다. 수업은 일주일에 총 두시간을 하기로 했고 모두 5명의 학생이 수업을 듣기로 했습니다.

사실 학교를 다니면서 계속 운동을 하려고 했으나 매일 귀찮아서 미루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과후가 시작되는 다음주부터는 그렇지 않을 것 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포츠인 농구로 운동을 하고, 또 꼭 해야하는 방과후 수업이기 때문에 꼭 해야한다는 의무감이 생겨서 빼먹을 일도 없을 것 입니다.

앞으로 2학기 생활이 너무나도 기대됩니다. 방송부도 시작하고 농구부도 제대로 활성화되면서 학교생활이 재미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주에는 드디어 학교가 방학을 끝내고 개학을 맞이했습니다. 오랜만에 학교에 가서 만난 친구들이 너무나도 반가웠고 학교생활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방송부에서 하는 활동때문에 정말 일주일 내내 계속 바빴습니다. 그래서 주말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잤습니다.

하지만 이번주 금요일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제사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다가 일어나서 바로 제사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제사를 끝내고 다음날, 저는 그제서야 조금 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편하게 쉬려고 했는데 청소년 문화의 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날은 우리 청소년 문화의집 동아리인 NED에서 부스를 운영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지친 몸을 이끌고 창동으로 갔습니다.

창동에는 사람들이 무지 많았습니다. 그리고 햇볕도 쨍쨍해서 매우 더웠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저는 부스를 운영해야 했습니다.


제가 동아리 회원들과 운영하는 부스는 바로 '청소년 인권' 에 관한 부스였습니다. 그 부스는 학교에서 선생님들로 부터 침해당하고 있는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운영했습니다.

예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학생들은 자신들이 생활하는 학교에서 국민으로써 지켜져야 할 인권이 많이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뺨을 맞거나 심한 체벌을 당하거나, 두발을 제한당하고, 성적으로 차별대우를 받는 것, 이 모든 것이 인권침해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이미 학생인권이 많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누구 하나 나서서 인권침해를 막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서 학생들을 상대로 학교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경험을 적어달라고 했습니다.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학교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경험도 엄청나게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학생인권조례' 가 제정되기 위해 서명운동도 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자율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는 태봉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인권을 침해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학생이고 다른 학교의 학생들이 인권침해를 당하는 것을 인터넷이나 친구로부터 많이 보거나 들어왔고, 그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인권이 보호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청소년 인권 부스를 운영했습니다. 물론 기회가 되면 앞으로도 계속 학생인권 부스를 운영할 계획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런 작은 부스를 운영한다고 해서 법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이런 활동이 다른 곳에서도 많이 활성화가 된다면 충분히 학생들의 인권은 보호받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태국에서의 마지막 포스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개학을 하다보니까 블로그 쓸 시간이 부족했네요;;; 태국에 다녀오고 블로그를 계속 쓰다보니 벌써 학교가 개학을 해버리네요.

어쨌든 태국에서의 마지막날의 하루전 우리 단원들은 마지막으로 반부왁캉 학교로 갔습니다. 거기에 있는 태국의 학생들도 헤어진다는 것을 알고있었는지 그날따라 더 신나게 우리들과 놀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학생들에게 계속 감사했습니다. 한국이라는 낯설고 먼 나라에서 찾아온 우리들을 11일동안 그렇게 잘 이해해주고 함께 놀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은 진정한 문화교류의 자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과 헤어지려니 모두들 감정이 격해졌나봅니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하나 둘 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태국의 학생들도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태국의 학생들 모두 각자의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을 마구 찍었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열심히 사진 촬영에 참가했고 그들에게 마지막 추억인 사진을 남겨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단원들과 태국의 학생들의 대부분이 울고있는데 아무래도 남자 단원들은 잘 울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남자들이 감성이 풍부하지 못하나 봅니다.


반부왁캉 학교에서 작별인사를 하고는 다시 둘쨋날에 갔던 산캄펭 YMCA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태국 관광을 조금하다가 바로 공항으로 갔습니다.

공항에는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 교류했던 몇몇의 태국인들과 반부왁캉 학교의 학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엇습니다.

비행기를 타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들과 인사를 하고싶은 것 이었습니다. 그들을 다시 만나자 단원들과 태국인들은 다시 눈물을 흘렸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정말 애틋한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마중나온 태국인들에게 감사한 나머지 저도 눈물을 잠깐 흘렸습니다.


그리고 유리로 된 공항의 출입구를 사이에 두고 정말 끝까지 눈물을 보이며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서 우리는 정말 그들과 헤어졌습니다.


저는 태국인들과 헤어지는데 전혀 슬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태국인들과 충분히 친해지고 정도 많이 들었는데 왜 슬프지 않았을까요?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결론이 대충 나왔습니다. 그건 제가 이별에 관대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과 이별할 때 그렇게 슬픈 감정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건 바로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태국의 학생들과 다시 만날 수 없다고 해도 저는 다시 만날거라는 기대가 조금이라도 남아있기 때문에 슬프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는 사람과 이별할 때가 아닌 이별했던 그 사람과 다시 만났을 때 감정이 격해집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시절 수련회를 갈 때, 출발할 때에는 부모님과 잠시 떨어져도 전혀 슬프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련회를 다녀오고 나서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는 바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헤어진 태국 사람들을 시간이 한참 흘러, 다시 만날 때에는 제가 바로 울 것 같습니다.

이별보다는 다시 만나게 되는 '재회' 에 눈물이 나는 저의 감정이 조금 이상하나요? 하지만 제 감정은 그런 것같습니다. 정말 태국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면 실컷 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정말 어른이 되어 태국의 치앙마이 부왁캉 마을에 가서 눈물을 쏟아내며 그들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태국에 갔을 때 우리들은 자원봉사를 한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문화교류를 하자는 마음가짐으로 갔습니다. 실제로도 반부왁캉 학교에서 문화교류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문화교류만이 아니라 진짜 자원봉사다운 일을 한 적도 있습니다. 바로 태국의 독거노인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러닝타이 팀이 지냈던 치앙마이의 부왁캉 마을에는 혼자 살고계시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집은 매우 지저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러닝타이 팀과 태국의 학생들이 힘을 합쳐 그 할머니의 집을 치우는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할머니의 집은 마치 폐허가 된 집처럼 금방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정말 '여기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나?'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 할머니의 집은 매우 심각하게 비위생적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많으니까 빨리 끝낼 수 있으리라 믿고 바로 대청소에 돌입했습니다. 집은 2층까지 있는 구조였는데 1층에는 창고와 부엌이 있었고, 2층은 거실과 침실이 있었습니다.


저는 1층에 있는 무거운 침들을 옮기고 쓰레기를 버리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2층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2층에는 여자들만이 청소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에게 작은 불상을 옮겨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태국에서는 여자가 불상을 만지면 안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태국이 불교의 나라이다 보니까 그런 예의를 철저히 지키나 봅니다.

2층에는 그런 종류의 작은 불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계속 2층에 남아서 청소를 했습니다. 2층은 그래도 할머니가 주무시는 곳이라 그나마 깨끗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2층이 더 심각했고 방마다 엄청난 먼지가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랍을 하나씩 열 때 마다 먼지가 대량으로 쌓여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할머니가 주무시는 방에서 끔찍하게 죽어있는 새의 시체도 발견되었습니다. 2층에 얼마나 먼지가 많았던지 점심시간에 2층을 청소했던 사람들은 전부 입맛이 없어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먹은 점심입니다.


그래서 저는 곧바로 선생님께 마스크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나중에 마스크를 구해오셨고 우리들은 마스크를 끼고 다시 청소에 임했습니다.

확실히 마스크를 착용하고 청소를 하니까 먼지도 덜 먹었고 청소도 빨리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청소를 끝마치고 모두들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찾아와 다짜고짜 청소를 해드려서 집주인 할머니께서 불편해 하시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할머니는 계속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서 고맙다고 하시니까 정말 청소를 해드린게 뿌듯했고 진짜 자원봉사같은 자원봉사를 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홀가분 해졌습니다.


지금까지는 계속 반부왁캉 학교에서 학생들과 놀기만하고 우리들이 너무 태국 사람들에게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약간 미안했는데 우리들도 직접 봉사를 하고나니까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정말 자원봉사를 자주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게된 것 같습니다. 자원봉사가 얼마나 행복한 일이고 멋진 일을 깨닫고나니까 앞으로도 이런 자원봉사를 많이 하고싶습니다.

태국에서 지냈던 12일동안 우리 단원들은 총 8팀으로 나누어 홈스테이를 했습니다. 단원들이 홈스테이를 했던 마을은 우리들이 자주 갔던 '반부왁캉 학교' 와 가까이 있었습니다.

홈스테이 가정에는 미리 YMCA에서 우리들의 식비를 지원해줬고 각 가정에 두 명씩 들어가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언어소통을 도와줄 태국의 대학생도 같이 지냈습니다.

함께 생활했던 대학생들은 태국의 어떤 대학에서 영어 교육과를 공부하고 있는 누나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인 영어가 되서 태국어를 모르는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와 함께 홈스테이를 지낸 태국의 대학생은 'JOY(조이)' 라는 누나였는데 같이 온 대학생들중에서 영어를 가장 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홈스테이를 하면서 소통의 문제는 전혀 없었습니다. 만약에 빨래를 하고싶다면 그냥 간단하게 JOY누나에게 영어로 빨래를 하고싶다고 말하고 JOY누나는 태국어로 홈스테이의 엄마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홈스테이는 예상외로 아주 편했습니다. 가족들은 항상 우리들에게 친절했고 밥도 맛있게 챙겨주셨습니다. 태국은 고기가 싼 나라라서 맛있는 고기를 많이 먹었습니다.

홈스테이에서 제가 밥을 먹었던 식탁.

그리고 우리가 자는 곳도 아주 좋았습니다. 딱 봐도 3인용 침대인데 한국에서 같이 온 형과 저, 이렇게 둘 만 잤기 때문에 아주 넓고 편하게 잘 수 있었습니다.

홈스테이에서 제가 잤던 곳 입니다.

하지만 홈스테이를 하면서 힘들었던 점도 많이 있었습니다. 힘들었던 점은 세가지 정도가 있는데 그 첫번째가 바로 언어문제입니다.

영어를 할 수 있는 JOY누나에게만 의지를 하고 지내서 그런지 정작 가장 가까워져야 할 홈스테이 가정집의 식구들과는 너무나도 떨어져 지냈습니다.


언어가 달라서 소통도 안될뿐더러 저에게는 JOY가 있었기에 딱히 홈스테이 식구들과 친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게 아직도 아쉽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홈스테이를 하면서 두번째로 힘들었던 점이 바로 '화장실' 입니다. 태국의 화장실은 우리 한국의 화장실에 비하면 너무나도 더러웠습니다.

변기와 샤워기가 같이 있었고, 가끔씩 바닥에 벌레가 기어다니기도 했으며 또 천장이나 벽에 '도마뱀' 이 붙어있는 경우도 엄청 많았습니다.


그래서 샤워를 할 때마다 눈을 꼭 감고 엄청난 속도로 해야했습니다. 도저히 제 비위가 버티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일 심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변기' 입니다. 태국은 대·소변을 보고나서 변기에 물을 퍼담아 물을 내리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게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더럽고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변기에 물을 퍼담고 있을 때의 그 느낌은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도저히 화장실 사용은 태국에서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었고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홈스테이에서 힘들었던 것은 바로 '모기' 입니다. 사실 태국에 가기 전부터 제일 걱정하던 것이 바로 모기입니다.

태국의 모기는 한국의 모기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의 모기약은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스프레이를 뿌리고 모기 기피제를 몸에 발라놓아도 모기는 끊임없이 저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은 '모기들의 천국' 이라고 할 정도로 모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한 번 하고 나오면 모기가 세 방 정도 물려있었습니다.

정말 모기는 태국에서 보내는 12동안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모기에게 한 번 물린 곳은 일주일 내내 가려웠고 아무리 모기약을 발라도 가려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태국을 다녀온 지금도 가끔씩 태국에서 물린 곳이 가려울 때가 있습니다. 정말 태국에서 모기는 악몽이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한국에서 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모기는 잘 물리지 않지만 태국에서 모기 물렸던 곳을 보면 너무 긁어서 그런지 보기 않좋을 정도로 심한 흉터가 있습니다.

정말 태국에서 힘들었던 점이 많았던 것 같네요. 하지만 그 힘들었던 점을 모두 극복하고 12일동안 무사히 태국에 다녀온 것에 대해 저는 너무나도 뿌듯하게 느껴집니다.

태국의 반부왁캉 학교에서는 문화교류를 위한 활동말고도 체육활동도 많이 했습니다. 말그대로 몸을 쓰는 활동입니다.

제일 처음 했던 활동이 아마 농사활동일 것 입니다. 농사는 우리 태봉고등학교에서 수업을 해주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 학교에서 수업하는 밭이 아닌 논에서 농사를 했습니다. 우리 러닝타이 팀의 단원들과 학교의 학생들이 직접 벼를 심는 활동이었습니다.

먼저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논에 트럭을 타고 갔습니다. 우리가 간 논에는 엄청난 양의 벼가 심어져있었습니다.


우리는 바지를 걷어올리고 그 논에 들어가 심어져 있는 벼들을 손으로 빼서 학교에 가져가야 했습니다. 저는 귀찮아서 다른 사람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캠코더로 촬영만 했습니다.

하지만 캠코더만 들고있으니까 몸이 근질근질해서 결국 캠코더를 선생님께 맡기고 저도 작업에 동참했습니다. 어릴 때 벼농사를 해본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너무 어릴 때 해봤고 사실 그렇게 많이 해본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힘들게 뽑은 벼들을 가지고 다시 트럭에 타서 학교로 이동했습니다.

학교에 도착한 우리들은 장갑과 장화를 끼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임했습니다. 이번에는 학교에 있는 논에 직접 벼를 심는 활동을 했습니다.

확실히 벼를 뽑는 것보다는 심는게 쉬웠던지 모두가 작업을 빨리 끝내고 쉬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은 훨씬 많이 흘러있었습니다.

벼 심는게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가는 줄 몰랐나 봅니다. 대충 손발을 씻고, 우리가 벼를 심어놓은 논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들 농사를 해본적이 없었는지 벼들은 모두 이상한 모양으로 심어져있었습니다. 그래도 다같이 힘을 모아서 농사 활동을 끝내놓으니 참 뿌듯했습니다.

두 번째로 했던 체육활동은 '운동회' 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반부왁캉 학교의 학생들과 그냥 운동회를 했습니다.

태국에서 많이 하는 운동을 주로 했는데 무슨 굴렁쇠를 굴리면서 달려 1등을 차지하는 게임과 그 게임을 이용한 릴레이 달리기, 그리고 팬티를 이용한 릴레이 달리기 등 특이한 게임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게임은 바로 '팬티를 이용한 릴레이 달리기' 였습니다. 게임을 하는 방법도 이름처럼 엄청 특이했습니다.

1번 주자가 바지위에 팬티를 입고 달린 다음은 다음주자에게 팬티를 벗어서 건네주고 다음주자가 다시 팬티를 입고 달리는 형식의 게임이었습니다.

모두들 팬티를 입고 달릴 때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달리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창피함을 줄이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게 되는 과학적인 게임이기도 했습니다.


운동회 말고도 다른 날에도 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 방과후 틈틈히 태국의 학생들과 축구를 하거나 농구, 배구를 하면서 체육활동을 했습니다.

확실히 열마디의 말보다 몸으로 한 번 뛰어노는게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남자들 같은 경우는 그냥 한 번 같이 뛰어놀면 바로 친해집니다.

역시 친해지려면 몸을 부딪히면서 화끈하게 놀아야하는 것 같습니다. 한창 뛰어놀 나이에 만날 앉아서 수업만 들으면 뭐합니다.

아마 어떤 학생이든 뛰어노는 것은 다 좋아할 것 입니다. 물론 부끄러움이 많아서 뛰어노는 것을 꺼려하는 학생도 있을 수 있지만 농사를 하거나 운동회를 통해 몸을 사용하니까 바로 다 친해졌습니다.

저는 태국에 가기 전에도 운동을 많이하는 타입이지만 태국에 와서 한 번 뛰어놀고 전부 친해지는 것을 보고 역시 운동은 만국공통어라는 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태국의 '반부왁캉 학교' 에서는 정말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태국에서 지내는 12일의 일정 중에서 대부분이 학교에서의 일정이다보니 학교에서의 활동은 정말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학교에서의 활동은 아무래도 학생들이 있다보니 전부 그 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하는 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반부왁캉 학교의 학생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제일 처음 했던 활동은 태국의 전통악기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태국의 학생들이 먼저 무대에서 전통악기로 공연을 하고 우리들이 태국의 학생들에게 악기다루는 법을 배웠습니다.

악기는 종류가 4~5개 정도 있었는데 저는 그 중에서 바이올린같은 현악기와 기타같은 악기 2가지 정도를 배워보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좀 이상하지만 솔직히 태국의 악기는 다루는게 정말 쉬웠습니다. 한국의 악기들은 각 음정마다 소리내는 법이 복잡하고 어렵지만 태국은 그냥 한칸씩 내려가는 형식이라서 외우기도 쉬웠습니다.

그리고 그 때 배웠던 기타와 비슷한 악기는 실제 기타와는 다르게 특별히 외워야하는 코드같은 것도 없었고 오직 간단하게 계이름으로만 연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배웠던 두 악기 모두 줄이 두 개밖에 없어서 아주 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금방 악기를 익혀서 연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배웠던 '비행기' 라는 노래를 연주해서 태국의 학생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태국 학생들이 박수를 쳐주면 저는 기분이 살짝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우리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했습니다. 바로 '자기 이름으로 도장만들기' 였습니다.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온 지우개를 이용해 한글로 이름을 새겨 도장을 만드는 활동이었습니다.

우리 단원들은 태국의 학생들에게 이름을 물어보고 지우개 위에 한글로 그 이름을 적어주었습니다. 그러면 태국의 학생들은 한글로 된 자기이름을 따라 칼로 파냈습니다.


그리고 도장밥에 찍어서 종이 위에 도장을 찍으면 태국 학생들의 한글로 된 자기이름 도장이 완성된 것 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학생들이 한 종이에 자기 도장을 찍었고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 종이 위에는 태국 학생들의 이름이 찍혀있는데 그 종이를 보면 태국인들의 이름이 한국에 비교하면 정말 특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잘 찾아보면 '똥' 이라는 이름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태국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외국이기 때문에 한 번 웃고 넘어갔습니다. 태국에서는 그런 이름이 일반적인 이름일테니까요.

또 제가 어릴 때 다니던 태권도의 도복을 입고 태권도 시범을 보여주고 태권도를 비롯한 한국의 여러 문화를 태국의 학생들에게 소개시켜주는 시간도 잠깐 가졌습니다.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는데 바로 태국 학생들과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인 활동입니다. 우리 러닝타이 팀이 미리 한국에서 준비해 온 봉숭아 물들이기 세트로 다함께 봉숭아 물을 들였습니다.

그 활동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바로 그 때 물들였던 봉숭아가 아직도 손톱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제 손톱을 보면 태국에서 봉숭아 물을 들였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놀이인 '제기' 를 직접 만들어서 제기차기를 해보는 시간도 가졌는데 사실 그 활동은 제기 만드는데 너무 열중해서 직접 차보는 것은 별로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래도 다른 형들이 태국의 학생들과 함께 제기차기를 하면서 재미있게 놀아서 마음이 좀 편했습니다.


그 외에도 태국의 전통문화를 배워보는 활동도 있었습니다. 태국의 전통음식을 만드는 활동도 하고, 태국의 전통 장신구를 만드는 활동, 태국의 꽃다발 만드는 활동 등... 참 많은 것 같네요.


저는 이 활동들 중에서 태국의 전통음식을 만드는 활동을 했습니다. 무슨 '떡' 같은 음식을 만들었는데 저는 너무 어려워서 잘 하지 못했습니다.

난생 처음보는 재료들을 섞어서 반죽을 하고 그 반죽한 것들을 어떤 나뭇잎에 싸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글로 적으면 정말 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계속 헤매다가 태국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세 개정도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만들고 나니까 뭔가 뿌듯하고 제가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태국의 반부왁캉 학교에서 했던 활동은 이것말고도 정말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 활동들을 이번에 전부 적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문화교류를 했던 활동들을 바탕으로 포스팅했습니다.

태국의 학생들과 문화교류를 하면서 정말 느낀게 많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의 문화를 태국의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니까 뭔가 한국인으로써의 자부심같은게 느껴졌고 반대로 태국의 문화를 배울 때에는 태국 학생들에게 고마움이 많이 생겼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우리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알려주고 우리나라의 문화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태국 학생들의 모습은 문화교류를 하러 온 저의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울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학생들과 태국의 학생들이 만나서 섞여 노는 모습은 정말 신기했습니다. 서로의 언어가 달라서 대화가 전혀 안되는데도 조금의 꺼리낌없이 활동할 수 있다는게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언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태국의 학교에서 한국의 학생들과 태국 학생들 사이에 언어는 무의미했습니다. 

언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그 어떤 말로도 그 모습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표현할 방법을 굳이 생각해본다면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 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를 이용해 한국, 태국의 학생들이 서로 어울리고 재미있게 지내는 모습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태국에서 주로했던 활동은 바로 '반부왁캉 학교' 라는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그 학교의 학생들에게 태국에 대해 배우면서 교류하는 활동이었습니다.

태국은 보통 한 학교에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모두 다닌다고 합니다. 저희 러닝타이 팀이 갔던 반부왁캉 학교 또한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전부 한꺼번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조금 특이했지만 그게 태국의 문화인 것 같아서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특이한게 있었는데 바로 교복입니다. 반부왁캉 학교는 학생들이 입는 옷이 요일마다 입는 옷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월요일에는 교복을 입고 화요일에는 사복을 입으며, 수요일에는 태국 전통옷을 입는 등 아주 특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국의 학생들

학교에 처음 가자마자 또다시 태국학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태국 전통춤을 구경했습니다. 준비를 많이 했는지 우리를 환영하는 공연을 엄청 길었습니다.

솔직히 전통춤을 추는 공연이 처음에는 신기하고 재밌었는데 계속 보니까 조금 지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러닝타이 팀도 공연을 해야하기 때문에 긴장되서 정신적으로 여유가 거의 없었습니다.


태국 학생들의 공연이 끝나고 드디어 우리 러닝타이 팀도 무대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들은 계속 산캄펭 YMCA에서 계속 연습했던 '아름다운 세상' 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안무 연습도 많이 부족하고, 반주로 나왔던 노래와 우리가 연습했던 노래가 잘 맞지 않아서 우리 팀의 공연은 말그대로 망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열심히 했기에 후회는 하지 않았고 모두들 웃으면서 태국 학생들에게 각자 연습했던 태국어로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홈스테이에서 우리를 돌봐주실 각 가정의 어머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홈스테이는 우리 팀의 총 16명이 2명씩 총 8팀을 나눠 각 가정에 가서 지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팀의 어떤 형과 같은 홈스테이가 되었고 우리를 돌봐주실 어머님은 '메무' 라는 분이었습니다. 태국에서는 엄마를 '쿤메' 라고 불렀고 우리들도 홈스테이 어머님께 쿤메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각 홈스테이의 쿤메들은 우리들의 손목에 흰끈을 묶어주셨습니다. 태국에서는 흰끈을 묶어주는게 '축복' 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저희 쿤메가 흰끈을 묶어주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홈스테이를 하며 지내는 일주일동안 그 흰끈을 손몪에서 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흰끈은 한국에 돌아온 지금까지도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세균? 때문에 계속 손목에 끼고다닐 수는 없지만 그 때 우리 홈스테이의 쿤메가 손목에 묶어주신 흰끈은 영원히 간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각 홈스테이에 배정되는 태국의 대학생들과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대학생들은 우리가 홈스테이에서 의사소통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사실 우리팀 모두가 태국어를 잘 하지못하기 때문에 홈스테이에서 의사소통이 많이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영어교육과를 공부하고 있는 태국의 대학생들을 각 홈스테이에 배정한 것 입니다.

홈스테이에서 우리의 의사소통을 도와줄 태국의 대학생들

이렇게 학교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그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과 자유롭게 노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직은 처음 만나기 때문에 서로 어색하고 잘 놀지도 못했습니다.

계속 놀다보면 그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을거라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태국의 학생들도 우리와 친해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태국에 가서 먹었던 음식들에 대한 포스팅을 해보려고 합니다. 음... 태국은 먼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쌀을 주식으로 먹습니다.

여러가지로 우리나라와 많이 비슷한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국은 음식을 만들 때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먹기 힘든 음식이 꽤 있었습니다.

그 향신료를 만들 때에는 어떤 풀을 사용해 만들었습니다.그 풀의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풀을 직접 먹으면 걸레같은 냄새가 나면서 더러운 맛이 나기 때문에 우리 단원들은 그 풀을 '걸레 풀' 이라고 불렀습니다.

태국에서의 첫 날 치앙마이 YMCA가 운영하는 호텔에서 먹었던 저녁밥은 정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음식들만 먹었습니다.


아무맛도 나지 않는 이상한 야채볶음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 그리고 바삭바삭하지만 안에는 처음 보는 야채가 잔뜩 들어있는 무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향신료가 잔뜩 들어간 국물까지.. 정말 하나같이 제 입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저히 먹지 못하고 음식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래도 '음료수는 맛있게지' 라고 생각하며 제가 가져온 달콤해보이는 음료수를 들이켰습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 음료수는 거의 맹물이었고 색만 진했습니다.

정말 그 때 맛없는 저녁밥을 먹고 앞으로 태국에서 12일을 어떡게 버틸까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다음날부터는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둘쨋 날 처음 먹은 음식은 무슨 오므라이스같은 음식이었는데 오므라이스와 맛이 많이 유사해서 맛있는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셋쨋날, 우리 러닝타이팀은 '반부왁캉 학교' 에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 때 먹은 점심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때에는 국수가 나왔는데 그 국수에는 면보다 고기가 더 많이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그 고기가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맛있었던 고기인 것은 분명합니다.

국수의 면과 고기까지 다 먹고나서 저는 시원하게 국물을 한모금 마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국물에는 방금 전에도 언급했던 '걸레 풀' 로 만든 향신료가 잔뜩 들어갔습니다.


할 수 없이 국물을 마시는 것은 포기하고 또다시 '걸레 풀' 의 무서움을 깨닫고는 태국 음식에 대한 두려움까지 생겼습니다. 정확히는 '걸레 풀' 에 대한 두려움이었죠.

하지만 태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태국 음식에 적응이 많이 되었는지 걸레 풀이 들어간 국물도 점점 꺼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인간은 오랜시간 특정 장소에서 지내면 그 장소에 적응을 많이 하나봅니다. 처음에는 먹으면 토할 것만 같았던 걸레 풀 향신료를 자원봉사 후반에는 맛있게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러닝타이 팀은 홈스테이를 하면서 지냈는데 홈스테이에서는 아침밥과 저녁밥을 먹었지만 카메라는 선생님께서 들고 계셨기 때문에 홈스테이에서 먹었던 음식은 사진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글로 한 번 적어보자면 먼저 홈스테이에서 약 7일간 먹었던 음식들은 모두 맛있었습니다. 태국은 고기의 가격이 싸기 때문에 고기를 많이 먹었고 저는 홈스테이에서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맛있었지만 고기를 많이 먹은 덕분에 얼굴에 여드름만 왕창 늘었습니다. 홈스테이에서 먹었던 고기들은 전부 돼지고기와 닭고기였으며 소고기는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돼지고기와 닭고기도 충분히 맛있었고, 고기류는 소스에 많이 찍어먹었고 닭고기는 대부분 닭꼬치로 요리해 먹었습니다.

이처럼 태국에서는 한국에서 못지 않게 푸짐한 식생활을 보냈고 위염 때문에 걱정도 했었지만 현재 건강에도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음식문화를 받아드리면서 혼란스럽고 힘들기도 했지만 점점 익숙해지고 입맛의 변화가 생기는 것을 경험해보니 이제는 그 어떤 음식을 먹더라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러닝타이' 팀은 태국에 도착해서 치앙마이 YMCA가 운영하는 호텔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태국의 중학생들이 우리들을 환영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있었습니다.

환영식은 저녁에 하기 때문에 우리 러닝타이팀도 저녁 때까지 환영식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딱히 준비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현지인에게 자기소개를 태국어로 할 수 있는 방법만 배워서 한명씩 태국어로 자기소개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폼 츠 태윤 캅(나의 이름은 태윤 입니다)', '폼 아유 씹젯 캅(나의 나이는 열일곱 입니다)' 라고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치앙마이의 현지인들과 학생들의 환영식이 시작되고 우리들은 태국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최대한 열심히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태국 학생들은 환영을 위한 공연을 보여줬습니다. 태국의 전통춤을 추고, 그리고 다 같이 앞에 나가서 YMCA의 주제곡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태국의 학생들과 섞여서 간단한 영어로 대화도 해보며 같이 놀고, 여러가지 게임과 태국, 한국의 소개 등 최대한 많은 것을 소통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렇게 재미있었던 환영회를 마치고, 처음으로 태국에서의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 러닝타이 팀은 산캄펭 마을에 있는 '산캄펭 YMCA' 로 출발했습니다.

져는 어머니가 YMCA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YMCA라는 단체에 대해 잘 알고있다고 자부해왔으며 외국에도 YMCA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이미 예전부터 알고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YMCA들은 우리나라의 YMCA들처럼 활성화가 되어있지 않고 아주 작은 단체정도로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태국의 YMCA도 충분히 활성화 되어있었으며 우리나라의 YMCA만큼 좋은 활동을 많이 하고있었습니다.

그리고 산캄펭 YMCA는 이미 다른 나라의 YMCA와도 수없이 많은 교류를 하고었습니다. 산캄펭 YMCA에 들어서자마자 한국어가 적힌 포스터가 보였고, 한국의 무술인 태권도 도복도 있었습니다.

또한 거기에서는 태권도를 학생들에게 주기적으로 계속 가르치고 있었고 구석에는 일본어가 적힌 포스터와 함께 일본의 전통옷을 입은 인형도 있었습니다.

이런 점들을 보아 우리 팀이 간 산캄펭 YMCA는 다른 나라의 YMCA들과 충분한 교류를 하고 있었고, 절대로 우리나라의 YMCA들에게 못지않게 열심히 활동을 하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태국에서의 자원봉사활동을 끝내고 바로 어제 우리나라로 돌아왔습니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우리태국팀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저는 모든 일정을 끝내고나서도 아직 5시간이나 더 버스를 타고 마산까지 돌아와야 했습니다. 집이 너무 그리웠던지 바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편하게 쉬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태국에 다녀왔던 포스팅을 작성합니다. 먼저 태국에 있는 12일동안 저는 무척 재미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나라에 갔기 때문에 많이 힘들고 고생도 많이 했었지만 자원봉사를 하는 모든 활동들이 전부 재미있게 느껴졌고 모든게 새로워서 힘들다는 생각은 금방 사라졌습니다.

인천국제공항에 우리 태국팀이 모두 모여 비행기를 타고 먼저 '방콕' 으로 출발했습니다. 5시간동안 비행기를 타고도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치앙마이' 에 가는 비행기로 갈아탔습니다.


비행기를 2시간이나 더 타서 도착한 곳은 태국 제 2의 도시라고 불리우는 '치앙마이' 라는 곳이었습니다. 우리 태국팀은 치앙마이 YMCA가 운영하는 호텔로 향했습니다.

호텔이라서 그런지 시설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에는 조금 이상한 차를 타고 치앙마이를 돌아다녔습니다.

태국 현지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


확실히 외국에 가니까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단원들이 태국어를 전혀 모르고 태국의 현지인들도 한국어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태국의 사람들은 영어도 전혀 할 줄 몰라서 의사소통을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같이 온우리 태국팀의 단원들끼리 서로 더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태국팀의 단원들이 좀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태국에서 열심히 자원봉사활동을 하려면 먼저 우리 단원들이 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숙소에서 단원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태국에 갔던 남자 단원들 중에 제가 제일 어리기 때문에 친해지는게 힘들까봐 걱정을 조금 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모두 저에게 친철했고 물론 저도 모든 단원들에게 친절하게 행동했습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인인 우리 단원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떤 트러블도 없이 단원들끼리 챙겨주고 의지하면서 여러가지 힘든 일정들을 힘을 합쳐 잘 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태국에 온 것도 벌써 3일째가 되네요. 지금은 홈스테이를 하며 어떤 가정집에서 태국인들과함께 지내고있습니다.

앞으로 10일 뒤에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때 까지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겠습니다.
드디어 해외자원봉사 사전교육의 마지막날 포스팅을 해볼까 합니다. 마지막날에는 제일 중요한 일을 했습니다.
바로 태국에 가서 할 활동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일정은 다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충 일정을 짜보았습니다. 저는 체육에 관련된 일정을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태국팀이 가는 태국의 '치앙마이' 라는 도시에는 학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학교에서는 태국 학생들이 수업을 다 마치고 축구, 농구 등 다양한 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저는 농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체육에 관련된 일정을 짰습니다.

하지만 체육 일정은 특별히 만들게 없었습니다. 그냥 태국에 가서 거기에 있는 도구들을 이용해서 다양한 운동을 하면 그걸로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대충 가서 어떤 종목의 운동을 할지 정하고 농구를 할 때 포지션을 정하면서 기본적인 틀만 만들어 놓았습니다.

구체적인 일정을 짜고나서는 평화수칙을 만들었습니다. 평화수칙이란 태국에서의 일정이 아니라 우리들이 각자 지켜야할 규칙같은 것 이었습니다.

태국에는 선생님께서 한 명만 가시기 때문에 우리들끼리의 규칙을 제대로 정해놓아야 통제가 잘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진지한 모습으로 평화수칙을 정했습니다.


평화수칙을 정하고나서는 각자의 역할을 정했습니다. 역할의 종류는 대표, 기록, 프로그램 진행, 켐페인 진행이 있었습니다.

대표는 말그대로 우리 태국팀의 모두를 대표하는 것이고, 기록은 글로 기록하는 서기 와 사진, 영상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한 프로그램과 켐페인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이 진행팀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 기록팀의 영상을 맡았습니다. 아무래도 제 장래희망이 방송연출가(PD) 이니까 영상쪽에 관련된 일을 많이 해보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태국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다 촬영하고, 집에 와서 편집도 모두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캠코더는 선생님께서 빌려와주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가 영상을 맡아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 제 카메라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태국에 가서 해야할 일과 각자의 역할을 모두 정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은 뒤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세 팀이 모두 모여 다같이 인사를 나누고 서울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났습니다.

우리가 태국에 가서 활동하는 일정입니다.


이제 8월 2일에 인천공항에 모여서 태국으로 가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내일입니다. 블로그에 열심히 글을 쓰다보니 벌써 태국으로 갈 시간이 되었네요.

사실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외국에 가는 것도 너무나 오랜만이고, 태국에 무려 11박 12일로 다녀와야합니다.

태국은 엄청나게 멀리 있고, 심하게 더운데다가, 말도 안통합니다. 그래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 아무리 15명의 동료들과 함께 간다고 해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봅니다.

그래도 해외자원봉사는 저에게 새로운 경험이고 그만큼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태국에 다녀오면 제가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태국에 가있는동안 또다시 블로그를 할 수 없겠네요. 하지만 태국에 다녀와서 블로그에 쓸 내용이 많을테니까 그 때 또 열심히 블로그 포스팅할께요. 12일 후에 뵙겠습니다.
서울에서의 둘쨋날의 마지막 일정은 'be a Peace builder'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Peace builder' 의 뜻은 대충 해석해보면 '평화를 만드는 사람'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선생님들께서는 'be a Peace builder' 이라는 일정이 특별히 무슨 활동을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그냥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 세 팀 모두 모이라고만 했습니다.

세 국가가 다 모이고 나서 우리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교육을 받는 안에서는 뭘 준비하는지 선생님들이 계속 들락날락 거렸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뒤 갑자기 선생님들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모든 선생님들께서 갑자기 조용해지셨고 청소년들에게도 조용하게 행동해라고 하셨습니다.

조금은 긴장된 마음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보니 불은 모두 꺼져있었고 수많은 촛불들이 모여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각 국가팀끼리 촛불을 둘러싸고 모여 앉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해외자원봉사를 가기 전에 버리고 가고 싶은 것을 생각해서 각 국가끼리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분위기가 어색한지 태국팀의 모두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저는 그 때 태국으로 자원봉사를 가기 전 '놀고싶은 마음' 을 버리고 가고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 또한 각자가 버리고 싶은 것들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각자가 들고 있는 종이에 '자신이 어떤 'Peace builder' 가 되고싶은지 적어서 벽에 붙인 뒤에 발표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종이에 '자유' 라고 적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Peace builder' 가 되고 싶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아무래도 태국으로 자원봉사를 가다보니까 가서 계속 일만 하는게 아니라 태국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자유를 만끽하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국가의 모든 청소년들도 각자가 어떤 'Peace builder' 가 되고싶은지 적어서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발표를 했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둘쨋날의 일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일정을 다 끝내고 각 국가끼리 모여서 간식을 먹었습니다. 간식은 제가 위염이 걸린동안 그토록 먹고싶었던 '치킨' 이었습니다.


무척 기대가 되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치키는 튀긴 치킨이 아닌 그냥 구운 닭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구운 닭보다 튀긴 닭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많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맛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앞으로 태국에서 무려 12일동안 함께 지낼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간식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겠죠.

함께 치킨을 먹으며 태국을 함께 가는 사람들과 같이 놀고 대화도 나누면서 더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태국에 가서 현지인들과 잘 생활하려면 같이 가는 우리들이 먼저 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의 교육 '신무역 게임' 이 끝나자마자 바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하도 정신없이 신무역 게임을 해서 그런지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점심을 먹고나서 숙소로 올라가 바로 잠을 청했습니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다보니 많이 피곤했나봅니다. 한숨 푹 자고일어나니 벌써 다음 일정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 태국팀만 모여서 '인권목록만들기' 를 했습니다. 모둠을 나누고 모둠마다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그 주제에 대한 인권목록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둠의 주제는 '에이즈에 걸린 13세 소녀의 인권' 이었습니다. 대체로 어린이가 에이즈가 걸리는 경우는 세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돈을 벌기위해 성매매를 하다가 에이즈에 걸리거나, 병원에서 주사를 맞다가 전염되거나, 아니면 대부분이 부모로부터 유전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원하지도 않게 에이즈에 걸린 어린이들은 사회로부터 많이 소외받습니다. 전염의 위험이 있다며 사람들은 에이즈에 걸린 사람을 일부러 멀리합니다.

그리고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약이 이미 만들어졌는데도 약이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에이즈 문제는 거의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국가는 이런 에이즈 환자들을 보호해주지 않고 에이즈가 걸렸다는 이유로 에이즈 환자들을 취직시키지 않는 기업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둠은 이렇게 사회로부터 심하게 차별당하고 소외당하는 어린이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인권목록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1. 에이즈에 걸린 어린이들이 교육받을 권리
2.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
3. 에이즈라는 병으로 인해 차별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
4. 어린이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취직의 자유
5. 국민으로써 국가에서 보호를 받을 권리


대충 이정도의 인권목록을 만들어서 포스터도 두 개나 만들었습니다. 먼저 여러명의 어린이들을 그려놓고 밑에 글로 'Who is AIDS?(누가 에이즈입니까?)' 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과 다른 아이들을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과 다를게 전혀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 입니다.

두번째 포스터는 에이즈에 걸린 어린이 한 명이 울고 있고 하는에는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 에이즈 약 하나를 그려놓았습니다. 

가난한 에이즈 환자들이 에이즈 약을 구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 처럼 어렵다는 표현한 것 입니다. 우리 모둠 말고 다른 모둠들도 모두 포스터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2모둠이었고, 1모둠은 태국의 소수민족이 가져야 할 인권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태국의 소수민족들은 쉽게 말해서 태국의 원주민을 말하는 것 입니다.

태국의 원주민들은 태국사람들의 무차별적인 개발때문에 그들이 살고있는 삶의 터전을 많이 잃어버리고 지금도 많이 고통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3모둠은 태국의 난민들이 가져야 할 인권목록을 만들었습니다. 태국의 난민들은 말그대로 태국의 거지들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주거지가 없고 돈도 없어서 매우 힘들게 생계를 꾸려나갑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았던터라 취직도 되 않아 돈을 벌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각 모둠들이 만든 인권목록과 포스터를 만들어서 가지고 나와 설명을 하며 발표를 했습니다. 각 주제는 선생님께서 정해주셨는데, 세개의 주제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태국의 소수민족과 에이즈에 걸린 어린이들, 태국의 난민 이 세개의 집단은 모두 가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기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보고도 못본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확실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권목록을 만들어보는 활동을 해보니 그런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가난이 죄다' 라는 말이 있을정도 이미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태국에 자원봉사를 다녀와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에서의 둘쨋날 아침을 맞았습니다. 숙소도 시설에 꽤 좋아서 상쾌하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저는 같은 방의 형들과 함께 아침밥을 먹고 다시 교육을 받으러 4층으로 같습니다.

둘쨋날 아침, 첫번째 일정은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세팀이 모두 모여 '신무역 게임' 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신무역 게임이란 모둠을 정해서 물건을 교환하고 거래하면서 실제로 무역을 해보는 게임이었습니다.

우선 각 모둠이 각 나라가 되었고 저는 우리 모둠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각 모둠의 대통령이 앞으로 나와서 봉투를 하나씩 골랐습니다.

제가 고른 봉투에는 알파벳 'C' 가 적혀있었고 클립 4개 .가위, 자, 컴퍼스, 그리고 종이 몇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특정조건을 만족시킨 도형을 만들어서 시장에 팔면 돈(클립)을 준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클립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모둠이 승리하는 게임이 바로 신무역 게임이었습니다. 보기에는 간단해보여도 생각해보면 신무역 게임은 무척 복잡하고 어려웠습니다.


우선 우리 모둠 C국가는 연필이 없기 때문에 특정 도형을 제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D국가에게 컴퍼스를 잠깐 빌려주고 연필도 빌려왔습니다.

그런식으로 계속 거래를 하며 도형을 왕창 만들어서 선생님께서 계시는 시장에 팔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우리 C국가의 도형을 잘 사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다시 팔아야 우리 C국가의 도형을 팔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연필이 조금씩 빌려쓰는게 아니라 영구적으로 필요한 상황이 왔습니다.

그래서 A국가와 거래를 했습니다. 연필이 많은 A국가가 우리 C국가에게 연필을 주는대신에 A국가는 우리 C국가의 도형을 시장에 팔아주고 벌어들인 돈의 40%를 우리 C국가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거래의 조건이 우리 C국가에게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에 우리 C국가는 당장 A국가의 거래를 받아드렸습니다. 연필도 받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의 거래였습니다.


그렇게 받은 연필로 열심히 도형을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국가의 대통령이 와서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들고 있는 도형의 조건이 바뀌었다는 소리였습니다.

원래는 지름이 8cm인 원을 만들어야 팔 수 있는데 시장의 가격변동으로 인해 꼭 지름이 4cm인 원을 만들어야 팔 수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가격변동에 대한 내용은 앞에 있는 칠판에 적혀있었지만 우리 C국가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형의 가격이 바뀐것을 한참 나중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만들었던 도형을 모두 버리고 다시 변경된 조건대로 도형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쨋든 그런식으로 우리 C국가는 계속 도형을 만들어 시장에 팔면서 꾸준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나고 게임이 끝났습니다.

각 나라가 번 돈과 세금으로 낼 돈, 쓰레기 배출량 이런 것들을 모두 계산해서 총 수익으로는 우리 C국가 총 6개 국가 중에서 4등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짜기라도 한듯이 A국가에 F국가까지 거의 순서대로 순위가 내려졌습니다. 그 비밀은 바로 처음 받았던 봉투에 있었습니다.

봉투의 알파벳은 각나라의 부유한 정도를 나타내는 것 이었습니다. A와 B국가는 선진국이었고, C와 D국가는 개발도상국, 그리고 E, F국가는 가난한 나라에 속했습니다.

우선 선진국에 속하는 A와 B국가는 처음 봉투를 받을 때 자본금(클립)이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더 많았고 가위나 연필, 컴퍼스, 자와 같은 도구들이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바로 선생님이 계시는 시장에서 다른 국가들보다 A, B국가에서 만든 도형을 더 잘 사주었다는 것 이었습니다.

E, F국가와 같이 가난한 국가가 만든 도형은 일부러 잘 받아주지 않았고 반면에 A, B와 같이 부유한 국가의 도형은 시장에서 무조건 사주었습니다.

E, F국가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다른 나라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힘들게 시작했습니다. 가위나 연필같은 꼭 필요한 도구들도 없었고, 자본금도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더 떨어졌습니다.

다행히 제가 속했던 C, D국가는 개발도상국으로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적당했기 때문에 그럭저럭 게임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국가에게도 불공평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각 국가에게 나누어 준 물건중에서 파란색 스티커가 있었는데 그 파란색 스티커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그 파란색 스티커를 도형에 붙여서 시장에 팔면 10배의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보통 국가들은 그것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파란색 스티커에 대한 정보는 선생님께서 일부러 A국가에게만 알려주었습니다. 부유한 국가와 다른 국가들은 정보력에서도 심하게 차이가 났던 것입니다.

A국가는 파란색 스티커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일부러 다른 국가들에게 거래를 하면서 다른 국가의 도형을 팔아주고 벌어들인 돈의 일부를 나눠주겠다고 거짓말을 하여 스티커를 붙여 도형을 팔아주고 아주 적은 돈만을 도형의 원래 주인 국가에게 나눠주면서 돈을 훨씬 더 쉽고 빠르게 벌어들였습니다.

신무역 게임이 끝나고 각 국가마다 느낀점을 말했는데 저희 C국가는 우선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에 대한 차별이 무척 심하다고 했고, 그런 문제가 해결되려면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릴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C국가는 지리적으로 멀리 위치해 있어서 선생님께서 게임에 대해 전달하는 것이 잘 들리지 않고 칠판도 잘 보이지 않아 많이 불공평했다는 것도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정말 이번 신무역 게임은 무척 재미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실제 국가간의 무역 시장체제와 많이 유사했고 현재 시장체제에 대한 문제도 직접적으로 알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부유한 국가의 물건은 일부러 잘 사주고, 가난한 나라가 만든 물건은 일부러 사지 않는 것이 현재 시장체제와 많이 닮았다는게 이번에 했던 신무역 게임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드밴티지였던 '파란색 스티커' 는 나이키나, 아디다스같은 메이커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물건이든 메이커를 붙여서 팔면 파란색 스티커를 붙여서 팔면 가격이 훨씬 올라가는게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신무역 게임을 해보면서 느낀게 참 많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학교에서 직접 신무역 게임을 진행시켜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또 배울 수 있는게 더 있겠죠.
서울에 가서 실시한 해외자원봉사 사전교육은 총 2박3일이었고 일정도 너무나 빡빡했습니다. 그래서 첫쨋날의 평화교육은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두번째 평화교육은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이 세팀이 모두 모여서 활동을 했습니다. 총 48명의 사람들이었는데 모두 앉아있으니 꽤 많아보였습니다.

어쨌든 세팀이 다 섞여서 모둠을 나눠 모둠마다 각각의 주제를 나눠주고 그 주제에 맞게 노래를 개사해서 모둠끼리 무대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활동을 했습니다.


저희 모둠의 주제는 '필리핀의 농부' 였습니다. 필리핀의 농부들은 땅의 소유자인 '지주' 와 농사를 해주는 '소작인' 으로 구분되어 계약관계를 맺습니다.

지주가 소작인에게 농사지을 땅을 빌려주고 소작인은 농사를 짓고나서 생긴 돈의 일부를 땅의 주인인 지주에게 지불해야합니다. 
 
생각해보면 땅이 많이 있는 지주들은 소작인들에게 땅만 빌려주고 일도 하지 않는 형태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너무나도 불평등해보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는 빈부격차가 계속 심해질 것이며, 소작인들은 열심히 일을 해도 지주에게 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일에 대한 의지도 사라질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작인들의 노동력이 점점 하락하게되고, 농업이 발달하지 못하여 사회적인 문제까지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없애기 위해 우리 모둠은 제도를 개선하고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자체를 해결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노래도 한 곡 만들었는데 소작인이 돈을 주지 않은 지주에게 돈을 요구하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해도 우리 모둠은 너무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노래를 만드는 과정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래를 개사해보면서 필리핀 농부의 어려움이나 문제점을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 같고, 그 문제의 심각성을 노래를 통해 한 번더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다른 모둠들은 노래를 다 잘 만들고, 잘 불렀지만 노래의 가사가 사실상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둠들도 노래를 만들면서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또 평화교육을 한 개 마치고 잠깐의 휴식시간이 있었습니다. 짧은 휴식시간임에도 우리 태국팀은 절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완성되지 않은 깃발을 만들었습니다.

쉬는시간이 있을 때마다 우리 태국팀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깃발만드는 것을 서로 도와가며 했고 단 한사람도 불만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여자 단원들은 숙소에 깃발을 들고가서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히 계속 깃발을 만드는 우리 태국팀은 그럴수록 계속 친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러닝타이' 팀의 멤버들 모두 처음에는 다 서먹서먹했어지만 다양한 활동을 같이 하고 깃발도 쉬는시간마다 계속 만들면서 서로에 대해 더 알게되는 시간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저는 바느질을 할 줄 몰라서 깃발만드는 일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태국팀이 협동해서 깃발 만드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태국에 가서도 깃발 만들 때의 협동심을 발휘해 더 많은 활동을 저 재밌고 알차게 해냈으면 좋겠습니다.
저번주 일요일(7월 24일)에 저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태국 자원봉사를 가기 전 미리 사전교육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침 8시에 출발했는데 서울에 도착하니 4시간이나 훌쩍 지나 벌써 12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사먹었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터미널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양푼이 비빔밥을 사먹었습니다. 원래 양푼이 비빔밥을 많이 좋아했었는데 거기의 음식은 조금 짰습니다. 원래 서울사람들이 조금 짜게 먹나봅니다.


대충 점심을 해결하고 바로 택시를 이용해 사전교육을 하는 '서울올림픽파크텔' 이라는 곳으로 출발했습니다. 터머닐에서 꽤나 멀었던지 약 30분정도를 가야했고 택시비는 만원이 넘게 나왔습니다.

어쨌든 저는 서울올림픽파크텔이라는 어느 호텔의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해외자원봉사 파견인들이 몇 명 앉아있었습니다. 약속시간인 2시가 되자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고 사전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태국으로 가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태국 이외에도 캄보디아와 필리핀에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각 나라마다 15명의 청소년과 1명의 인솔자 선생님으로 이루어져 총 16명을 이루었습니다. 우리 태국팀에는 대학생이 3명 있었고 남자는 5명, 여자는 1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대충 간사님의 말씀을 듣고, 각 나라끼리 모여서 자기소개시간을 가졌습니다. 태국팀의 15명중에서 저만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튀어보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의견을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자기소개시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마산에서 서울까지 왔다고 당당히 말했고 태봉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것도 자신감있게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 태봉고등학교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기 때문에 전혀 부끄러운게 없었습니다.

저는 태봉고등학교에 대해 말하면서 서울사람들의 대안학교에 대한 나쁜 인식을 바꾸려고 열심히 학교소개를 했습니다. 다행히 대안학교를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인사도 그렇게 나누고 각 나라에 가서 사용할 깃발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태국팀은 '태국에 가서 발로 뛰며 열심히 활동하겠다' 라는 의미로 '러닝타이' 라는 팀명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깃발에는 팀명에 맞춰 사람이 달리고 있는 모습을 바느질로 그려넣었습니다. 바느질하는 재료는 어디선가 주워 온 버린 옷들이었는데 색의 제한이 조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바느질이라 그런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태국, 캄보디아, 필리필 3팀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쉬는시간마다 꼬박꼬박 바느질을 해서 완성시키기로 했습니다.

잠시 쉬고나서 바로 또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일정을 보니 휴식시간이 따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빡빡한 일정을 계속 소화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초반이라 그렇게 힘든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태국팀이 받은 첫번째 교육은 '평화의 문화' 라는 주제의 평화교육이었습니다.

먼저 각자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평화가 있으려면 꼭 있어야하는 것들과 없어야 할 것들을 적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총 5개를 적었는데, 저는 친구, 이불, 잡념, 소음 같은 것들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각자가 적은 것들을 돌아다니면서 비슷한 의미를 가진 것들끼리 모아서 교육을 하시는 선생님께 제출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모아진 평화에 대한 단어들을 화이트보드에 붙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크게 공동체, 사랑, 학교, 경쟁, 전쟁, 편안함 등으로 나뉘어진 것이 보였습니다.


평화에는 공동체와 사랑, 편안함 등이 있어야 하고, 학교와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평화가 있으려면 학교가 없어야한다는 반대했습니다.

학교가 없어야 한다고 적은 사람은 학교가 있으면 경쟁이 일어나기 때문에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학교가 없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평화가 오더라도 학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교육이 되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다른 방법으로 교육을 실천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학교가 있을 때 만큼의 교육의 활성화가 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경쟁이 없어지되 선의의 경쟁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의견에도 반대를 했습니다. 선의의 경쟁을 하지 않고도 서로를 도우며 배우는 배움의 공동체를 실천해서 교육을 하면 경쟁 없이도 얼마든지 경쟁했을 때보다 더 나은 성과의 교육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수업만 듣는게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계속 말하고 남의 의견도 들어보면서 평화에 대해 조금 더 직접적으로 배울 수 있어서 정말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평화에 대한 이해는 다양하지만 결국에는 몇 가지의 큰 주제들로 묶이는 것을 보고, 이런 모습을 통해 평화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결국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이제 겨우 첫 번째 평화교육을 받았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평화교육 받은 것을 바탕으로 블로그에 포스팅하기로 하겠습니다.
역시 방학이라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심심하네요.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가 벌써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남해로 여행을 갔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블로그에 소홀했던 것 같네요. 구차해도 변명거리가 있습니다. 남해로 여행을 다녀오고나서 몇일간 몸이 아파서 계속 누웠있었습니다.

무슨 위염인가? 라고 불리는 병에 걸렸었는데 밥을 규칙적으로 안먹고 아이스크림같이 차가운 음식을 많이 먹어서 걸리는 병이라고 했는데 저와 딱 맞는 것 같았습니다.

남해에 친구들과 여행 가서 과자를 진짜 많이 먹었고,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도 정말 많이 먹었습니다. 그래서 위염에 걸렸던 것 같았습니다.

약 3일간 두통으로 집에 누워있었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제가 16년간 세상을 살아오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특히 그저께(7월 20일 수요일)에는 그날 하루만에 구토를 무려 6번이나 했습니다. 토를 한 번 할 때마다 무척 고통스러웠고 역겨워서 정말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바로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위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고 다행히 거의 다 나았다는 것도 알게되서 약간은 안심이 되었습니다.

제가 먹고있는 약입니다.


병원에서는 주사를 놓아주었고, 약국에서는 3일치의 약도 받았습니다. 약도 꾸준히 챙겨먹고 식단도 조절한 덕에 지금은 몸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얼른 몸이 회복되고 서울에 가서 해외자원봉사에 대한 사전교육을 받아서 8월달에는 태국으로 자원봉사도 떠나야합니다. 

방학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몸을 회복시켜야겠습니다. 
같은 반의 친구들과 남해로 여행을 가니 역시 뭔가 색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친구들이랑 놀 때에는 노래방이나, 당구장에 가거나 농구를 하러 가면서 항상 똑같이 놀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들끼리 직접 회의를 하고, 여행의 일정을 짜서 여행을 가니까 노래방이나 당구장보다 훨씬 더 재미가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함께 가신 담임 선생님을 제외하고 저를 포함해서 총 8명이 여행을 갔는데 먹을 것을 사려고 장을 볼 때 약간 힘든 점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장을 볼 때에는 8명 모두가 각자 먹고싶은 음식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의견충돌과 개인행동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먹고싶은 음식만 계속 고집한다거나 자기가 먹고싶은 음식을 사기 위해 따로 마트를 돌아다닌다거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반이 단합이 안된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해수욕장을 갈 때 싹 없어졌습니다. 해수욕장을 갈 때 우리들은 담임 선생님의 7인승 차를 타고 갔는데 무려 9명이나 타서 너무 좁아서 많이 불편했습니다.

게다가 해수욕장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거의 1시간 30분동안 길을 헤맸습니다. 하지만 해수욕장에 가는동안 친구들 모두 불편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친구들 모두 힘을 합쳐서 이정표를 계속 쳐다보고 보이는 사람마다 해수욕장의 위치를 물어보면서 사촌 해수욕장이라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해수욕장에서 우리들은 정말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재정이라는 친구가 튜브도 들고왔었고 다들 무더운 날씨라 그런지 정말 재미있게 놀았던 것 같습니다.

해수욕장을 가기 하루 전에는 계곡을 갔었는데 계곡에서 놀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넓고 깊은 남해의 바다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렇게 놀고나서 할아버지 집에 돌아갈 때에는 다행히 길을 잘 찾아서 빨리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역시 친구들은 모두 할아버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뻗어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몇몇의 친구들은 선생님과 함께 저녁밥을 준비했고 나중에는 저녁밥을 정말 배가 터지게 먹고도 모자라서 컵라면도 먹었습니다.

정말 남해 여행에 다녀와서 살이 1kg 정도 더 쪘을 정도로 여행에서 음식을 많이 먹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여행에서 많이 노니까 그 만큼 많이 먹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숨 푹자고 나니까 여행의 마지막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저는 전날 밤에 늦게까지 계속 놀아서 그런지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조금 구겨져서 잠을 잔 덕분에 몸이 매우 뻐근했습니다. 하지만 아침 일찍 마산으로 출발해야 했기에 금방 일어나서 짐을 싸고 집을 대충 치우고 난 뒤 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차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게 벌써 어제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여행도 끝났으니 방학동안 당분간 학교의 친구들을 볼 수가 없겠네요.

확실히 학교생활이 너무나도 재미있다보니까 벌써 방학이 지루해지고 개학이 기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방학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저는 방학동안 서울에도 가야하고, 태국에도 해외자원봉사를 떠나야합니다. 다른 친구들도 저처럼 방학동안 각자가 해야할 일이 있을테니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의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면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니 그렇게 조급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학교에서 우리반 학생들이 계획을 짜서 방학 때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여행을 갈 장소는 남해에 있는 저의 할아버지 집으로 정했습니다.

할아버지 집에는 이제 아무도 없기 때문에 가끔씩 사람이 가줘야 될 것 같아서 제가 우리 할아버지 집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각자 2만원씩 가져와서 끼니를 해결하고 2박3일동안 신나게 놀 계획을 짜서 우리반 담임 선생님께 보여드렸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갈 때 담임 선생님도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여행 당일날 우리들은 두 팀으로 나눠서 남해에 가기로 했습니다. 진주에서 가는 사람들과 마산 시외버스터미널에 모여서 가는 사람들이 모여 남해로 출발했습니다.

남해에 도착해서 진주팀과 만나서 함께 장을 보러갔습니다. 각자의 용돈을 모아서 삼겹살, 햄, 라면, 음료, 각종반찬 등 다양한 음식들을 잔뜩 구입해서 택시를 타고 할아버지 집으로 갔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할아버지 집은 몇 달동안 비워서 그런지 매우 지저분했습니다. 총 8명의 친구들이 힘을 모아서 함께 힘을 모아 집을 치우니 금방 깨끗해졌습니다.

우리들은 집에서 우선 조금 쉬다가 바로 계곡으로 놀러갔습니다. 계곡은 집에서 얼마 멀지 않아서 쉽게 갈 수 있었습니다.

각자 시원한 계곡물에 몸을 던지며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서로 물에 빠뜨리기도 하고 미끄러워서 넘어지기도 하면서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같이 간 친구 중에서 문석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친구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벽을 짚어서 벌에 쏘인 것 입니다.

상황이 너무 웃겨서 친구들 모두 벌에 쏘인 문석이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석이는 심각했습니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지만 물에 들어가자마자 벌에 쏘여서 놀지도 못하고 재미있게 놀고 있는 친구들을 지켜보기만 해야했습니다.

벌에 쏘인 문석이의 손가락

왼쪽에 앉아있는게 문석이 입니다.


하지만 그런 불쌍한 문석이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친구들은 계곡에 몸과 영혼을 맡기고 재미있게 놀고있었습니다.

어쨌든 계곡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고나서 우리들은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모두 즐거워했고 다행히 문석이도 즐거워보였습니다.

계곡에서 나와 남녀를 나눠 샤워를 하고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학교에서 일하시다가 우리들을 위해 일부러 길을 찾아가며 힘들게 오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이며 저녁밥을 준비중이셨습니다. 우리들을 샤워를 끝내고 맛있는 저녁밥을 먹었습니다.

우리 담임 선생님께서 요리 선생님이시고 선생님의 정성이 듬뿍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라면스프를 넣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녁밥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저녁밥을 다 먹고나서 설거지를 하면서 깨끗하게 정리도 했습니다. 친구들이 서로 도와가며 일을 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언젠가 우리반 아이들에게 직접 밥을 해주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밥을 해줄 수 있어서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바쁘신데도 남해까지 먼길을 달려와주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밥도 해주시고, 정말 여러모로 이번 여행에서 선생님의 역할이 참으로 컷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생님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은 의미가 별로 없었을 것 입니다. 친구들끼리 놀아도 되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처럼 어른이 있어야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 담임 선생님께서 함께 해주신 것만 해도 정말 크게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