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9월 8일 토요일) 어머니가 진행하는 캠프 '근현대사 산책' 에 사진 및 영상 촬영이라는 임무를 맡고 따라갔습니다.

이번에 근현대사 산책에서 간 곳은 바로 '진주' 였습니다. 진주는 저희 외갓집이 있는 곳이라서 많이 가 본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친구들이 진주에 많이 살고있기 때문에 진주에 많이 놀러가기도 했었고 옛날부터 진주 유등축제에 놀러가기도 많이 했습니다.

여튼 이번에 근현대사 산책에서 진주를 간 이유는 바로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 운동' 에 대해사 공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형평 운동은 어떤 운동일까요?

형평 운동이란?
저울대 형(衡)에 평평할 평(平)자를 써서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천민 백정들에 의해  직접 조직된 '형평사' 에 의해 벌어진 인권 운동을 말합니다.

당시 조선시대에서는 백정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이 심했었고, 백정 사회는 경제적으로 복잡해지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한창 일제에 대항하여 3·1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일본의 백정 계급인 에다족의 해방을 위해 수평사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힘입어 1923년 조선에서 형평(衡平)사가 창립되고 같은 해 11월 7일에 형평사는 북파(서울), 남파(진주)로 분열되어 진주(남파)에서는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집니다.

도대체 백정들에게 어떤 차별적인 대우가 있었기에 이런 형평 인권 운동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요?


백정(白丁)은 어떤 계급인가?
백정의 백(白)은 '없다' 라는 뜻으로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인 농민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조선시대에는 가축을 잡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변화되었습니다.

백정들은 태어날 때부터 차별을 당하는데 백정들은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그것도 모자라 이름에 돌 석(石), 이름 돌(乭), 가죽 피(皮)와 같이 좋지 않은 뜻의 글자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교육적인 면에서도 차별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정들은 교육기관 입학 및 과거를 포함한 일체의 공권에서 배제당했고 서당, 근대교육 기관의 입교 거부 및 차별은 물론 취직도 되지 않았습니다.

백정과 일반인과 혼인 금지, 백정들이 결혼을 할 때에는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을 뿐더러 남자는 상투를 틀지 못하고 여자는 비녀를 꽂지 못하는 등의 혼인 문화에서도 엄격한 제한이 있습니다.

백정들은 일반인들에게 나이에 관계없이 존댓말을 사용해야 했고, 명주옷과 두루마기를 입을 수 없고 갓 대신 패랭이 착용 등 일상적인 생활에서조차 차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백정들이 장례를 치를 때에는 상복 및 지팡이를 쓸 수 없었고 삼베와 두건만을 사용해야 했고, 상여가 금지되고 일반인들의 묘지와 격리된 곳에 묘지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렇듯 백정들은 조선시대에 출생에서 죽음까지 전 생애에 걸쳐서 엄청난 차별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런 백정들에 대한 차별에 항거한 운동이 바로 형평 운동입니다.


저희 근현대사 산책에서는 이런 형평 운동에 대해 바로 알기위해 진주의 여러곳을 가보았습니다. 일반인들과 함께 예배를 한다는 동석 예배를 했던 진주 교회에 갔습니다.

카를 목사가 세운 옥봉리 교회(후에 옥봉리 교회에서 진주 교회로 명칭 변경)는 일반 신도들이 백정들과 함께 예배 보는 것을 반대하여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따로 예배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카를 목사의 후임인 리알 목사는 '백정들도 일반인들과 함께 예배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반인들과 백정들은 함께 동석 예배를 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리알 목사의 뜻을 따르던 30여 명의 신도들을 제외한 나머지 200여 명으이 신도들이 동석 예배를 거부하고 예배당을 나가버렸습니다.

동석 예배 거부사건은 교회라는 종교를 통한 백정들의 희망과 좌절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진주 교회 외에도 구 진주청년회관과 형평운동기념탑, 형평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강상호 선생의 묘소 등 형평운동에 관련된 여러곳을 방문하면서 형평운동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상호 선생의 묘소에서 묵념하고 있는 모습.


형평운동의 의의
형평운동의 기본적인 목적은 '백정' 이라는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것과 인권 존중, 평등한 대우를 원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 평등' 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일깨우기 위한 활동이라는 점에서 형평 운동은 우리 역사상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려는 대표적인 인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평운동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차별을 받고있는 사람들의 인권을 찾는 운동이 민주화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습니다. 역시 오랜만에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니까 무척 반가웠습니다. 학교에 가기 전 친구의 생일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생일은 2월 29일!!! 원래 2월달은 28일까지 있지만 4년에 한 번씩 날짜를 맞추기 위해 29일이 존재한다고합니다.

그러니까 그 친구는 4년에 한 번씩 생일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4년마다 찾아오는 2월 29일날에 태어났습니다.

보통 2월 29일이 생일인 사람은 28일이나 3월 1일에 또는, 음력으로 처리해서 생일을 챙긴다고 하는데 그 친구는 그냥 4년마다 한 번씩 생일을 챙겼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오는 마지막 생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그 친구의 생일을 더욱 축하해주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생일이니까 챙길 수 있을만큼 다 챙겨줘야죠.ㅎㅎㅎ 그래서 저도 그 친구의 생일을 멋지게 축하해주고 싶었습니다.

그 친구는 진주에 사는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친구들이 그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진주에 모였습니다. 학교가 개학하기 딱 하루 전 이라서 많이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2월 29일이 생일인 그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친구들이 모여서 같이 밥을 먹고 영화도 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놀다가 노래방에 갔는데 갑자기 다른 친구들이 몰래 귓속말을 했습니다. 귓속말의 내용은 생일을 맞이한 친구 몰래 케익을 사오자는 것입니다.

저는 찬성을 했고 잠시후 노래방 시간이 거의 끝나 갈 쯤에 친구 몇 명이서 케익을 하나 사왔습니다. 그리고 타이밍을 맞춰 생일축하 노래를 틀고 케익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물론 생일을 맞은 친구는 깜짝 놀랐습니다. 감동을 받은 친구의 모습을 보니 저도 왠지 흐뭇해지더군요. ㅋㅋ
비록 4년에 한 번 오는 생일이지만 그 친구는 4년치의 행복을 얻어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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