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간 YMCA 하령회를 다녀왔습니다. 하령회는 각 권역의 청소년 YMCA 회원들이 모여서 축제를 벌이는 행사입니다. 


YMCA 하령회는 중부, 서부, 영남 이렇게 세 권역으로 나뉘어 진행이 되고 저희 마산은 영남 권역의 하령회에 참석했습니다.

하령회는 1년에 한 번씩 2박 3일로 진행이 되며 올해는 안동에 있는 청소년 수련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령회에 처음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하령회에 대해 기대가 많이 되었습니다. 마산 YMCA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YMCA 사람들도 만나고 함께 활동하면서 놀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새로운 경험일 것 같았습니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안동에 있는 한 청소년 수련원에 도착을 했습니다. 다른 지역의 YMCA들이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 하령회 첫날
그 곳에 모인 YMCA 회원들은 학생들만 해도 약 140명정도가 되었고 각 지역의 간사님들도 10명 정도가 계셨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수의 YMCA 회원들과 함께 하는 하령회가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하령회의 주제는 바로 '걸어서 백두대간 끝까지' 였습니다.


의미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것입니다. YMCA 청소년들이 모여 북한 남한 분단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하여 남북 분단 현실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함께 한반도 평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는 자리였습니다.


YMCA 하령회에서는 책자도 한 권씩 지급했습니다. 그 책에는 하령회 일정과 북한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었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한 하령회의 첫 프로그램은 각 지역의 YMCA 활동을 소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저희 마산 YMCA도 지역소개를 해야 했습니다. 원래는 마산의 운영위원장 학생이 해야하는데 그 학생이 하루 늦게 도착을 해서 지역소개를 제가 하기로 했습니다.


하령회 전 날, 갑작스레 연락을 받아서 하루만에 지역소개 준비를 해야했습니다. 원래 만들어진 PPT를 이용하여 대충 준비를 마치고 지역소개 발표를 했습니다.

저는 마산 YMCA에서 하고있는 여러가지 동아리 활동을 중심으로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문화의 집과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활동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습니다.


비록 준비는 미흡했지만 제가 나름대로 재미있게 발표를 해서 인기는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틈틈히 웃기는 농담을 이용하여 발표가 지루하지 않게 했습니다.

또한 재치있고 다양한 동아리 활동에 대해 하나하나 특징을 잡아서 빠르게 진행한 것도 마산 YMCA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심어주는데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지역소개를 무사히 마치고 이제 조를 나누었습니다. 사람이 워낙 많다보니 조를 총 13개조로 나누었습니다. 한 조에 11명씩 넣어도 조가 13개나 만들어져버렸습니다.

그 13개의 조 중에서 저는 9조가 되었습니다. 9조의 학생들은 대부분 조용한 아이들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와 조장이 계속 분위기를 이끌어가며 조활동을 했습니다.

저희 9조의 이름은 저의 의견으로 '전교조' 라고 지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교조는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이 아니라 '전교' 라는 단어의 의미로써 전교생 즉, 조원 전체의 의견을 모두 수렴하여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전교조라는 조이름을 발표할 때 많은 다른 학생들이 비웃었습니다. 물론 전교조라는 이름은 조금 억지일 수는 있겠지만 저희 조에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깊은 조이름입니다.


여러가지 조활동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활동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특정 단어를 가지고 YMCA를 표현하는 활동입니다.

그 활동은 주최측에서 제공하는 특정 단어 몇 개를 선택하여 그 단어들을 이용해 YMCA를 표현할 수 있는 한 문장을 만드는 활동이었습니다.

먼저 조 내에서 각각 한 명씩 문장을 만들어보았습니다. 단어는 랜덤으로 고르는데, 제가 '섹시' 라는 단어가 걸려서 YMCA를 '섹시' 라는 단어로 표현해야해서 큰 고난을 겪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인상깊었던 한 문장이 있었는데 저희 조에 어떤 학생이 만든 문장입니다. 그 친구는 '투쟁' 이라는 단어를 뽑았고 그 단어를 이용해 'YMCA는 나쁜 어른들이 억압하는 세상에 대한 학생들의 투쟁이다.' 라는 멋진 문장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조에서도 비슷한 문장을 만들어냈습니다.

단어를 이용해 YMCA를 표현하는 프로그램은 다른 지역과 다른 조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YMCA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들어볼 수 있었고, YMCA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활동이 끝나고 간식도 먹고 여러가지 게임, 담력테스트 등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 대표들이 모여서 영남 권역 YMCA의 회칙 개정에 대한 회의를 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YMCA 회칙은 제가 다니고 있는 태봉고등학교 학생회 회칙과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회의에 참여했습니다.

회칙을 자세히 읽어보니 저희 태봉고와 정서가 맞지 않는 내용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꾸자고 의견을 냈는데 반대가 거의 만장일치여서 제 의견은 기각되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회의 중에 여러번 있었습니다. 살짝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다수의 의견이 반대하는데 어쩔 수가 있겠습니까?

태봉고등학교의 정서가 YMCA 임원들 정서와는 많이 다른가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조용히 받아들였습니다. 회의를 열심히 하다보니 어느새 새벽 2시가 되었고 그렇게 하령회의 첫날이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하령회의 남은 2일이 정말 기대되는 하루였습니다. 
우리 '러닝타이' 팀은 태국에 도착해서 치앙마이 YMCA가 운영하는 호텔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태국의 중학생들이 우리들을 환영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있었습니다.

환영식은 저녁에 하기 때문에 우리 러닝타이팀도 저녁 때까지 환영식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딱히 준비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현지인에게 자기소개를 태국어로 할 수 있는 방법만 배워서 한명씩 태국어로 자기소개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폼 츠 태윤 캅(나의 이름은 태윤 입니다)', '폼 아유 씹젯 캅(나의 나이는 열일곱 입니다)' 라고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치앙마이의 현지인들과 학생들의 환영식이 시작되고 우리들은 태국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최대한 열심히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태국 학생들은 환영을 위한 공연을 보여줬습니다. 태국의 전통춤을 추고, 그리고 다 같이 앞에 나가서 YMCA의 주제곡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태국의 학생들과 섞여서 간단한 영어로 대화도 해보며 같이 놀고, 여러가지 게임과 태국, 한국의 소개 등 최대한 많은 것을 소통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렇게 재미있었던 환영회를 마치고, 처음으로 태국에서의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 러닝타이 팀은 산캄펭 마을에 있는 '산캄펭 YMCA' 로 출발했습니다.

져는 어머니가 YMCA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YMCA라는 단체에 대해 잘 알고있다고 자부해왔으며 외국에도 YMCA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이미 예전부터 알고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YMCA들은 우리나라의 YMCA들처럼 활성화가 되어있지 않고 아주 작은 단체정도로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태국의 YMCA도 충분히 활성화 되어있었으며 우리나라의 YMCA만큼 좋은 활동을 많이 하고있었습니다.

그리고 산캄펭 YMCA는 이미 다른 나라의 YMCA와도 수없이 많은 교류를 하고었습니다. 산캄펭 YMCA에 들어서자마자 한국어가 적힌 포스터가 보였고, 한국의 무술인 태권도 도복도 있었습니다.

또한 거기에서는 태권도를 학생들에게 주기적으로 계속 가르치고 있었고 구석에는 일본어가 적힌 포스터와 함께 일본의 전통옷을 입은 인형도 있었습니다.

이런 점들을 보아 우리 팀이 간 산캄펭 YMCA는 다른 나라의 YMCA들과 충분한 교류를 하고 있었고, 절대로 우리나라의 YMCA들에게 못지않게 열심히 활동을 하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태국에서의 자원봉사활동을 끝내고 바로 어제 우리나라로 돌아왔습니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우리태국팀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저는 모든 일정을 끝내고나서도 아직 5시간이나 더 버스를 타고 마산까지 돌아와야 했습니다. 집이 너무 그리웠던지 바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편하게 쉬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태국에 다녀왔던 포스팅을 작성합니다. 먼저 태국에 있는 12일동안 저는 무척 재미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나라에 갔기 때문에 많이 힘들고 고생도 많이 했었지만 자원봉사를 하는 모든 활동들이 전부 재미있게 느껴졌고 모든게 새로워서 힘들다는 생각은 금방 사라졌습니다.

인천국제공항에 우리 태국팀이 모두 모여 비행기를 타고 먼저 '방콕' 으로 출발했습니다. 5시간동안 비행기를 타고도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치앙마이' 에 가는 비행기로 갈아탔습니다.


비행기를 2시간이나 더 타서 도착한 곳은 태국 제 2의 도시라고 불리우는 '치앙마이' 라는 곳이었습니다. 우리 태국팀은 치앙마이 YMCA가 운영하는 호텔로 향했습니다.

호텔이라서 그런지 시설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에는 조금 이상한 차를 타고 치앙마이를 돌아다녔습니다.

태국 현지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


확실히 외국에 가니까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단원들이 태국어를 전혀 모르고 태국의 현지인들도 한국어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태국의 사람들은 영어도 전혀 할 줄 몰라서 의사소통을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같이 온우리 태국팀의 단원들끼리 서로 더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태국팀의 단원들이 좀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태국에서 열심히 자원봉사활동을 하려면 먼저 우리 단원들이 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숙소에서 단원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태국에 갔던 남자 단원들 중에 제가 제일 어리기 때문에 친해지는게 힘들까봐 걱정을 조금 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모두 저에게 친철했고 물론 저도 모든 단원들에게 친절하게 행동했습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인인 우리 단원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떤 트러블도 없이 단원들끼리 챙겨주고 의지하면서 여러가지 힘든 일정들을 힘을 합쳐 잘 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21일은 근현대사캠프의 마무리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일단 학교를 마치고 아버지의 회사로 가서 짜장면을 맛있게 먹고 YMCA로 갔다.

그곳에 가니까 근현대사캠프의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청소년문화의 집에서 전화가 왔다. 그랬다. 그 날은 독서토론도 해야하는 날이었다.

근현대사와 겹쳐서 나는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청소년문화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내가 초등학교때 매우 친했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무척 반가웠다. 우리는 독서토론을 끝내고 함께 YMCA에 가서 오랜만에 같이 놀았다. 한참동안 그렇게 놀다가 그 친구는 집에 가고 나는 YMCA에 남아서 근현대사캠프의 마무리를 준비했다. 내 역할은 사진을 보고 그 사진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5, 6월에 간 근현대사캠프의 사진을보고 멘트를 준비했다. 멘트는 생각보다 쉽게 생각났고 빠른 속도로 머릿속에 집어넣고 다른 아이들이 준비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5시에 행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의 발표가 시작되고 마침내 가 발표할 차례가 되었다. 나는 미리 외워둔 멘트로 발표를 술술해갔다.

그런데 내가 미리 멘트를 준비하지 못한 사진이 나왔다. 나는 참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생각나는대로 사진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6월의 사진이 나왔다. 이건 정말 아예 기억도 나지않는 사진들이라서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않았다.

결국 나는 6월 발표를 하지못하고 중간에 무대에서 내려왔다. 나는 얼른 선생님께 아 상황이 어떻게 된것인지 여쭤보았다.

선생님께서는 실수로 나에게 사진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무척 안타까웠다. 그래도 어머니와 선생님께서는 발표를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오늘 발표로 나는 준비를 철처히 해야겠다는 큰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는 이런 실수가 없기를 바란다.
어제 마산YMCA 근현대사산책 캠프를 갔다. 그 캠프는 근현대사산책의 마지막 캠프였다. 그래서 1박2일로 일정을 잡아서 YMCA에서 하룻밤을 잘 계획이었는데 신종플루 때문에 그렇게는 못하고 그냥 다음달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나는 일단 어머니와 함께 택시를 타고 YMCA로 가서 짐을 싸서 버스를 타고 다른 아이들을 태워서 봉하마을로 갔다. 봉하마을은 6월에 삼촌네 가족과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다녀온 곳이다. 그래서 두 번째 간 것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서거하신 노무현 전 대통령 님의 명복을 빌었다.

원래 캠프 계획을 세울 때는 봉하마을에 가서 노무현 전 대통령님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을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노무현 전 대통령님께서 서거하시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노무현 전대통령님을 추모하는 모습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님을 모시던 대통령 비서관 님께서 오셔서 대통령님이 하시는 일이라든가 연설을 하실때 연설문을 만드시는 방법과 퇴임 후에 하시던 일 같은 것들을 쉽게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그 비서관 님은 노무현 전 대통령 님께서 비서관님들께 항상 배려심이 깊었다고 하셨다. 항상 비서관들에게 존댓말을 쓰셨고 연휴 때 시골에 내려가지 못하는 비서관들을 위해 비서관들을 시골에 내려보내고 자기는 시골에 내려가시지 않았다고 하셨다.

나는 그 때 정말 놀랬다. 얼마나 비서관들에게 배려심이 깊었으면 자기를 희생하여 비서관들을 위했을까? 나라면 아마 노무현 전 대통령 님처럼 절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비서관님의 말씀을 듣고 기념품을 산 뒤에 다시 YMCA로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중간에 차에서 내려서 망원경으로 새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거기에서 새를 많이 보지 못했다. 이상하게 망원경을 보아도 새가 한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 곳에서 나와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선생님께서 버스로 돌아가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 선생님께 물어보니까 이미 다른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버스로 돌아갔다고 하셨다.

나는 깜짝 놀랬다. 분명히 내가 가장 먼저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먼저 돌아가 있었다. 그래서 나와 친구들도 버스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선생님께서는 버스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버스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길을 물어보았다.

우리는 그 친구가 가르쳐준 길로 쭉 갔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전화를 해보았다.

우리는 아예 반대로 가고있었다. 우리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방황을 하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쭉 돌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으니 마침내 버스가 보였다.

나는 얼른 버스로 뛰어가서 다리가 아파서 바로 드러누웠다. 그렇게 힘든 낙오를 거치고 우리는 다시 YMCA로 출발했다.

얼마 후 드디어 YMCA에 도착을 했다. 나는 나의 조의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께 돈을 받아서 홈플러스로 갔다. 거기에서 우리는 스파게티의 재료와 아이스크림의 재료를 구입했다. 우리는 다시 YMCA로 달려가서 스파게티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1시간쯤 요리를 하고 드디어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우리 조는 맛있는 스파게티와 다른 조들이 만든 불고기와 라볶이를 함께 먹었다.

그렇게 맛있게 저녁을 먹고 우리는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었다. 후식까지 모두 먹어치운 우리들은 짐을 싸서 근처에 있는 청소년문화의 집으로 갔다. 우리는 그 곳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캠프를 다니면서 찍은 영상을 편집했다.

우리조는 찍은 영상을 너무 많이 잘라내서 영상의 총 시간이 3분밖에 안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편집을 하여 5분정도로 다시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집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음악만 넣으면 되는데 시간이 끝나서 결국 편집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선생님들께서 음악정도는 직접 넣어주신다고 하셨다. 나는 무척 안심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음달에 다시 와서 우리가 편집한 영상을 보고 그 동안 즐거웠던 캠프를 다시 떠올리며 기억하는 일만 남았다.
이번에 YMCA에서 운영하는 청소년문화의 집으로 가게되었다. 내가 거기에 간 이유는 바로 독서동아리를 만들기 위해서 였다.

나는 내 친구인 성진이와 함께 갔다. 우리가 청소년문화의 집에 가니까 거의 아무도 없었다. 아마 우리가 먼저 가서 일 것이다.


그리고 한 30분후 독서동아리의 아이들과 선생님이 오셨다. 그리고 먼저 각자 자기소개부터 하였다. 아이들은 한 명만 빼고 모두 중학교 2학년을 올라가는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일단 먼저 청소년문화의 집에 대한 설명과 동아리를 만들 때 인원수, 지금 총 동아리의 개수 등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조금 읽을만한 책을 각자 말하여 보았다. 아이들이 말한 책 중에는 옛날에 내가 읽은 책도 조금 있었다.


그 다음에는 동아리의 이름을 정하기로 하였다. 동아리의 이름에 대하여 아주 많은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동아리의 이름을 잘 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동아리의 이름은 다음에 모일 때 한 명씩 생각해 와서 괜찮은 이름으로 정하기로 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이제 언제 다시 모일지, 모일 때 가져올 책을 정하게 되었다. 모이는 날은 한 달에 한 번으로 다음 달 셋째주 토요일에 모이기로 하고, 그 때 가져올 책은 바로 '소크라테스가 들려주는 행복 이야기' 라는 아주 쉬운 책으로 정해졌다. 선생님께서 처음이니까 조금 쉬운 책으로 정하자고 하셨다.

나는 이 동아리를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활동할 것이다.
저번주 토요일에 마산MBC에서 하는 '어린이 영상체험 캠프'에 다녀왔다. 그 캠프는 평소에 잘 아는 친구들과 함께 갔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과 같은 조가 되어서 MBC에서 하는 영상수업을 들었다.

일요일 저녁 6시까지 각 조의 영상작품을 찍으라고 하셨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우리 조의 친구들과 나는 굉장히 당황했다. 그래도 한번 해보려고 각 조의 영상 주제를 정했다. 우리조의 주제는 바로 '폭력' 이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기대를 많이 하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밤에 치킨을 시켜먹었다. 그리고나서 다른 조는 전부 쉬고 있는데 우리 조만 영상을 찍고 있었다. 오늘 다 찍고 내일 많이 쉬겠다는 수작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영상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다. 우리 조는 촬영장소를 계속 바꿔 가며 몇 번의 촬영을 거듭하여 마침내 밤10시부터 시작한 촬영이 새벽3시에 결말이 되었다. 정말 힘들었었다.

우리 조는 촬영을 마친뒤 숙소로 돌아와서 다른조 는 거의 다 자는데 우리 조만 컴퓨터를 켜고 각자 하고싶은 일을 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일요일) 우리 조는 아침 10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12시까지 먹은 뒤 짐을 싸서 다짜고짜 PC방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PC방 앞에는 이상한 형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무사히 PC방으로 들어갔지만 나와 내 친구 '장운이'는 각자 5000원씩 돈을 뜯겼다. 정말 짜증났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PC방에서 실컷 놀고 나오니까 속이 아주 쉬원했다.

우리 조는 오후 2시까지 PC방에서 놀다가 당장 짐을 챙겨서 마산MBC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조의 아이들이 많이 와있었다.

우리 조는 당장 편집을 시작했다. 편집은 내가 감독을 맡았고 내 친구 '성진이'는 옆에서 나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친구들은 우리 조의 간식을 사러 갔다.


나와 성진이는 편집을 시작했다. 그런데 편집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냥 중간 중간에 이상한 부분은 잘라버리고 부족한 부분은 붙여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였다. 나는 또 영상이 아주 어렵게 조작하는 작업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처음으로 조폭들이 몽둥이로 때리는 장면의 중간부분을 잘라내어 몽둥이로 아주 세게 때리는 장면으로 바꾸었다. 그것을 본 선생님은 아주 감탄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아주 재능이 있다고 하셨다. 나는 기분이 왠지 좋았다.

그리고 4시간여의 편집을 끝낸뒤 우리 조는 무려 2시간동안 쉬었다. 그건 아마 우리 조가 빨리 끝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친구 한 명이 없어졌었다. 그 친구는 바로 나와 제일 친한 '지성이'라는 친구였다. 다른 친구들 말로는 집으로 도망갔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매우 실망하였다. 

마침내 영상이 공개되는 순간이 되었다. 우리 조는 매우 두근거렸다. 우리 조의 영상의 내용은 한 왕따가 조폭들한테 맞다가 그 왕따가 나중에 엄청 화가 나서 자신을 때리던 깡패들을 혼내준다는 내용이다. 이 영상에서 감독으로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들과 다른 아이들은 잘 이해가 되지않은 모양이였다.

결국 우리조의 영상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이번 캠프를 통해서 영상이라는게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때까지 나는 영상같은 것은 그냥 카메라로 찍으면 그냥 완성되는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하나의 영상이란 출연자와 편집하는 사람들 찍는 사람들 등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앞으로는 TV를 볼때 TV의 내용만 보지 않고 TV속에 나오는 영상을 만들 때 함께 제작했던 사람들의 노력을 생각하며 보겠다.

나는 5월 10일 토요일, 5월 광주민주항쟁에 대하여 배우기 위해 광주로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갔다. 마산YMCA 근현대사 교실에서 마련한 여행이었다.

그곳에 다녀오고 나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것 같다. 그리고 공수부대에게 끔찍하게 죽어간 우리 조상들의 고통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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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아이.


솔직히 그때 광주시민들에게는 아무 죄도 없었다. 그런데도 광주시민들은 폭도라는 이름으로 총을 맞고 죽어갔다.

그리고 제일 원망스럽고 슬펐던 것은 바로 광주시민들이 잡혀 들어 갔었던 지옥의 감옥 상무대이다. 상무대는 지금 5.18자유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주 작은 감옥에 잡혀온 광주시민들 150명을 넣고 반항하는 시민들만 모아서 1평도 안되는 감옥에 넣었다. 방이 좁아서 움직일수도 없고 잘때도 뒤로 살짝누워서 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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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들어가는 곳.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것만이 아니다.

아침 7시부터 저녁10시까지 양반자세로 앉은뒤, 고개를 숙이고 무려12시간 동안 그상태로 가만히 있어야 하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감옥에서 나오게 하여 야구방망이로 여러군인들이 구타를 했다.

또 그렇게 6개월 동안 살다가 재판장으로 데려가서 재판을 내리는데 그 재판도 정말 말도 안되었다.

일단은 애국가를 부른는데 재판관은 폭도들이 부르는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라며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애국가가 나올 때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손을 자기 가슴에 대고 노래를 불러야 한는데... 정말 광주시민들을 인간취급도 안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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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지성(왼쪽)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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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독방체험.



애국가가 끝난 뒤 재판을 시작하는데 재판과정이 진짜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일단 몇명을 일어나게 한 뒤 죄명을 10개 정도를 만들어 내어 갖다 붙인 뒤에 사형, 무기징역, 징역 14년 등을 판정한다. 만약 재판을 받는 것을 거부하면 밖으로 데려가서 야구방망이로 구타를 하여 처참하게 죽였다.

희생자 묘역에도 가봤는데, 그 때 희생된 분들 중 나보다 어린 나이에 죄없이 군인의 총에 맞아 죽은 경우도 있었다. 고등학생 형도 엄마가 사주신 고무신을 신고 놀던 중 미끄러져 고무신 찾으러 갔다가 죽기도 했다고 한다.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정말 끔찍하다. 국민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대한민국 군인이 같은 민족을 죽이다니...
앞으로 이런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않된다.

지금의 우리가 이만큼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것도 그때 전두환과 싸웠던 광주시민들 덕분이다.

광주시민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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