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돌아가신 할어버지의 첫 생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해에 내려가서 하룻밤을 자고 간단하게 차례를 지낸 뒤 다시 마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랜만에 시골에 다녀오니까 몸이 좀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TV나 보고있었는데 '세상에 이런일이' 라는 프로그램이 방송중이었습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을 보고있었습니다. 그 방송은 일상과는 다른 모습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오늘은 산속에서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의 생활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도시에서 살다가 나쁜 일을 당하셔서 도시에 대해 안좋은 기억이 생기셨고 몇 년 전부터 산속에 들어와 혼자 사셨다고 합니다.

날씨가 추운 겨울에 산속에서 혼자 움막에서 사시는 모습을 참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작년 여름에도 방송에 나오셨는데 겨울이 되어 다시 방송에 나오셨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눈이 쌓여서 아주 추운 겨울산에서도 항상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시고 계셨습니다. 밥은 늘 컵라면을 한끼만 드셨습니다.

뜨거운 물을 사용하면 산불이 나서 다른 사람들이 고생할까봐 늘 눈이나 차가운 빗물을 컵라면에 넣어 30분간 불려서 드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께서는 고생하는 PD에게 자신의 식량인 컵라면을 정성스럽게 만들어주셨습니다. 할아버지 자신도 무척 힘들게 사시는데 늘 남을 먼저 생각하는 그 할아버지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 할어버지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산에 가서 생필품과 먹을 것 들을 사드리고 따뜻한 말을 전해주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할아버지는 혼자 슬픈 눈물을 흘리십니다.

저도 그 모습을 보고 TV앞에서 혼자 조용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도시에서 생긴 마음의 상처가 산 속에서 살며 지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도시로 돌아가셔서 편안하게 생활하시라고 말씀드려고 끝까지 할아버지는 아직 도시에 갈 때가 아니라며 움막으로 돌아가십니다.

그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힘들지 않으시냐고 물어보면 항상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괜찮아요. 이 정도 할만해요" 한 눈에 봐도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도 늘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괜찮다고 하시는 할아버지는 정말 마음이 따뜻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저도 다음에 그 할아버지께서 움막속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산에 가서 그 할아버지에게 조금이나마 따뜻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가 벌써 6개월정도 되어갑니다. 이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제사는 우리집에서 해야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남해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제사를 지냈지만 지금부터는 할아버지 없이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삼촌이나 고모들도 계셔서 그렇게 걱정될 일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집에 병풍이나 큰 밥상같은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는 제가 삼촌네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떠났을 때 가져왔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정사진과 제사에 필요한 몇가지 물건들을 지난번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남해에 가서 가져왔습니다.

남해에서 가져온 그릇들입니다.

하지만 제사를 지낼 때 가장 중요한 병풍과 상이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집에도 상은 있었지만 제사를 지내기에는 너무 작은 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결국 병풍과 상을 한 개씩 구입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남해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도 병풍과 상은 있었지만 거기에서 병풍과 상을 트럭에 실어서 가져오는 비용이 새로 구입하는 비용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냥 병풍과 상을 새로 구입했습니다.

굳이 남해에 있는 병풍과 상을 가져와서 사용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입해서 주문한 병풍과 상이 오늘 집으로 배달이 왔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경비실에 있는 병풍과 상을 한 개씩 한꺼번에 들고오기로 했습니다. 저는 꾀를 부려서 훨씬 가벼울 것 이라고 예상되는 상을 들기로 했습니다.

크기만 클 뿐 나무라서 별로 무겁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틀렸습니다. 상은 저 혼자의 힘으로 들 수 없을만큼 무척 무거웠습니다.

잘 들지 못하는 저의 모습은 본 아버지는 들고 계신 병풍과 제 상을 바꿔주셨습니다. 병풍은 상보다 훨씬 가벼웠습니다. 병풍은 정말 제가 한 손으로 들 수 있을만큼 가벼웠습니다.

정말 힘을 들이지 않으려고 꾀를 부린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아버지는 웃으시면서 "앞으로 꾀를 부리면 안되겠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정곡을 찔려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으로 와서 저와 아버지는 병풍을 펼쳐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상도 갖다놓으니 꽤 제사를 하는 폼이 났습니다. 저는 얼른 절까지 해보았습니다.

앞으로 영원히 그 병풍과 상을 가지고 제사를 지낼 것 인데 절 정도는 해줘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병풍과 상까지 사니까 이제 정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 실감이 났습니다.

이제부터 예전처럼 열심히 우리집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9월 5일(일요일)에 있는 제사는 우리집에서 처음으로 지내는 제사니 더욱 정성을 다해 지내겠습니다.
아무리 나이키라도 오래 쓰면 떨어지네요

저는 1년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졸라서 나이키 신발을 구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역시 나이키라서 그런지 신발은 저에게 충분히 멋있고 만족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하얀색이라서 그런지 금방 더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신발을 아주 자주 빨아야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빨아서 쓰던 중 다른 신발을 사게되고 그 신발을 신게 되면서 나이키 신발을 신는 경우는 드물어졌습니다.

그렇게 3학년이 되고 저는 또 신발을 샀습니다. 그 신발은 나이키에 못지않는 '필라 신발' 이었습니다. 그 신발을 사게되면서 나이키 신발은 저에게 점점 잊혀지게 되고 결국 다시는 신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을 이사하게 되고 신발장을 정리하면서 이미 낡아버린 나이키 신발을 보게되었습니다. 저는 그 신발을 세탁소에 맡겨 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직접 신발을 빨았습니다. 돈이 아까워서라기 보다는 그냥 제 손으로 그 신발을 깨끗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처음 살 때에는 엄청나게 좋아했고 멋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러워지면서 점점 저에게서 잊혀져간 신발이 다시 저의 손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모습을 보고싶었습니다.

사람마다 하나씩은 있을 것 입니다. 자기 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물건, 저에게는 그 신발이 그런 존재입니다. 단순히 나이키라는 상표 때문에 그런게 아니라 제가 처음으로 신발을 사면서 기분이 좋았던 신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시 오랫동안 신발장에 넣어두어서 그런지 무지하게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씻기도 무척 힘들었습니다. 저는 최대한 세게 씻었습니다.

다른 곳도 많이 찢어졌습니다.

그런데 너무 세게 씻어서 그만 신발이 찢어졌습니다. 분명히 찢어졌습니다. 이미 신지 않는 신발이라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도 않았습니다.

사흘동안 신발을 말리고 나서 그 신발을 신고 아버지와 외출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에 비가 왔습니다.

저는 혹시라도 찢어진 틈으로 빗물이 들어올까 일부러 물웅덩이를 피해다녔습니다. 다행히 빗물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신발을 비오는 날에 계속 신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찢어진 신발을 신고다니면 친구들이 놀릴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신발을 빨면서 찢어진 것도 다 추억입니다.

저는 그 신발을 버리지 않고 할아버지댁에 가져다놓을 생각입니다. 이번 방학 때에 할아버지 댁에 쌀을 가지러 잠깐 가는데 그 때 신발을 갖다놓을까 합니다.

할아버지 집은 제가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추억이 많이 쌓인 곳 입니다.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돌아가셔서 시골에 내려갈 일이 별로 없으니까 저의 추억이 담긴 그 신발을 집에 놔두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저번주 토요일 저와 어머니, 아버지는 고향 남해에 마늘을 뽑기 위해서 남해에 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 전에 저와 아버지는 제 방에 있는 2층침대를 분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2층 침대를 남해에 갖다 놓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아버지는 2층 침대를 힘들게 분해한 후 트럭을 한 대 불러서 남해로 출발했습니다.

어머니는 트럭에 자리가 없어서 시외버스를 타고 남해로 출발하셨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남해에 도착해서 분해한 2층 침대를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리산에 갈 때보다는 아니었지만 정말 죽을만큼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힘을 좀 쓰니까 몸이 개운하고 뻐근한 느낌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침대 조립을 하던 도중 침대와 세트인 책상위치를 잘못잡아서 책상을 다시 옮겨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그런데 책상을 다시 옮기기에는 방이 너무 좁았습니다.
 

확실히 고향집은 천정이 높으니까 2층 침대가 폼이 났습니다.


그래서 저와 아버지는 고민 끝에 책상은 그대로 놔두고 침대 자체를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그렇게 침대를 옮기던 중 그만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어떻게 책상이 아닌 침대를 옮길 생각을 했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침대를 힘들게 조립하던 도중 어머니가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돼지고기를 사오셨습니다. 저는 고기 생각에 더 힘이 나서 침대조립을 완성했습니다. 확실히 2층 침대는 아파트에 있는 것 보다 시골주택에 있는 것이 훨씬 더 폼이 났습니다.

우리는 잠시 쉬다가 할아버지 집을 깨끗이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얼마전에 돌아가시고 두 달 정도 집에 아무도 없었던 탓에 집안 곳곳에 거미줄이 칭칭 감겨있었습니다.

군데 군데 거미줄이 많았습니다.


저는 청소기로 거미줄부터 깨끗하게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몇 번 쓸고닦고 하다보니 집은 다시 제 모습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 밤이 깊고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서 숯불에 돼지고기를 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군침을 삼키며 돼지고기를 한 입 먹었습니다.


일하고 나서 먹는 돼지고기의 맛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고기를 다 먹고나서 냉면을 먹었습니다.

역시 식당에서 먹는 냉면보다 집에서 직접 해먹는 냉면이 훨씬 맛이 좋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맛있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저는 오늘 힘들게 가져온 2층 침대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저는 원해 할아버지 집에서 잠이 잘 오지않는 체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익숙한 2층 침대에서 자니까 잠이 훨씬 잘 왔습니다. 저는 그렇게 편안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들은 일어나자마자 마늘을 뽑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밭에는 이미 동네의 다른사람들이 마늘을 모두 뽑아놨습니다.

우리는 덕분에 할 일이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마늘부위만 잘라서 망사에 담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저와 아버지는 집에 돌아가서 일에 필요한 장비들을 가지러 갔습니다. 저는 집에 간김에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웠습니다.

그리고 밭에 가보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매우 열심히 일을 하고계셨습니다. 저도 얼른 그 일에 동참했습니다. 저는 신들린 속도로 마늘을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손을 거친 마늘들은 속수무책으로 잘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마늘을 많이 잘라도 마늘들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던 중 어머니가 갑자기 집에 먹을 것을 가지러 들어가셨습니다. 어머니가 간 후 동네의 한 할머니께서 간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그 간식들로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컵라면을 싸오셨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간식을 먹고나서도 그 컵라면을 모두 해치웠습니다.

이제 배도 부르고 우리들은 더욱 열심히 마늘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늘을 다 자르고 우리는 이제 마늘을 망사에 담기시작했습니다.


이미 많이 지친 몸이라서 마늘 담는 일이 더욱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계시는 여러분들은 마늘 담는데 별로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시지 않겠지만 마늘의 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잠시 그늘에서 쉬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 틈에 남은 간식을 모두 해치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쉬다가 다시 30분 정도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모든 일을 끝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늘을 조금 챙겨서 마산에 있는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어젯밤 남은 돼지고기를 넣은 맛있는 찌개와 함께 점심을 먹고 1시간 정도 잠을 잤습니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몸이 많이 지치고 피곤한 상황이라 잠이 아주 잘 왔습니다. 1시간 후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서 다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동네친구분의 차를 타고 마산으로 돌아가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습니다. 오랜만에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해보니 공부하면서 느끼는 피곤함과 스트레스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수확한 마늘을 돈으로 치면 약 30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하루동안 일하면서 번 돈 보다 많은 액수이지만 어머니는 이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30만원을 벌기 보다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공부 안하고 이렇게 일해서 돈을 벌 바에야 차라히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게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힘들게 일한 것을 계기로 하여 앞으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지난 3월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할아버지께서 제 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집에서 할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가훈을 발견하셨습니다.

그 가훈이 할아버지의 유언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훈을 적은 종이는 우리 집에서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물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저를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할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저는 할머니께서 건강하신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충격에 빠져서 그만 온 몸에 수분이 다 빠질 정도로 울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저는 몇 번씩 시골에 내려가서 할아버지와 일주일 씩 함께 지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할머니 없이 혼자 사셨기 때문에 제가 옆에 있는 것이 훨씬 덜 외로우실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제가 시골에서 밤늦게까지 TV를 보고있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저보고 얼른 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TV를 끄고 할아버지 옆에 누웠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데도 TV만 보는 제가 너무 한심하고 할아버지께 너무 죄송스러웠습니다.

저는 그만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 눈물을 흘린 뒤로 할아버지께 더 잘해드려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할아버지께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제일 할아버지께 잘 해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때부터 할아버지께 더욱 잘 해드렸습니다.

원래 잘 해드려야하지만 더 최선을 다해서 할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예를 들면 할아버지께서 입원하셨을 때 가장 많이 병문안을 가서 할아버지를 보살펴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고있는데 할아버지께서 몇 달 후면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청천병력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때 병원에 입원하고는 있었지만 돌아가실 정도로 큰 병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계신 할아버지 옆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질 않으셨습니다.

저는 뭔가 이상해서 할아버지를 계속 불렀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계속 천장만 쳐다보시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계속 뭔가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잠시후 별 이상이 없는 줄 알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경련을 일으키고 계셨습니다.

간호사들은 할아버지를 얼른 재우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1인실로 방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 이제 진짜로 돌아가시는 건가...' 저는 한숨만 내쉬며 쓰디쓴 눈물만 흘렀습니다.

몇일 뒤 할아버지께서는 제가 보는 앞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저는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가 미리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울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엄청나게 많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했습니다.

앞으로 할아버지께서 쓰신 가훈을 매일 보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떠올릴 것 입니다.

작년 할아버지와 봉하마을에 가면서...

내가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저번주 화요일(3월 2일) 드디어 제가 3학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미리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한 통 받고 할아버지께서 계시는 병원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엄청 위독하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얼른 병원으로 갔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침대에 누워계시고 아버지와 고모 두 분께서 울고계셨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간호사가 들어와서 할아버지의 상태를 검사하고 할아버지께서 사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들은 고모들과 아버지는 대성통곡을 하시면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 계시던 어머니도 울고계셨습니다. 저도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조금 뒤에 량호네 가족이 병원으로 와서 할아버지의 옆에서 울었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병원에 있는 할아버지의 물건을 챙겨서 집으로 옮겨놓고 다시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에는 우리 친척들이 장례식장에서 울고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후에 남해에서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사진에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건강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이제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또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몇 시간 뒤 모든 친척들이 장례식장에 왔습니다. 친척들은 모두 함께 할아버지께 절을 하고 할아버지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어른들은 할아버지께서 고통없이 편안하게 돌아가셔서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물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니 무척 슬펐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셔서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는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때 갑자기 돌아가셔서 충격때문에 엄청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제사가 끝나고 우리들은 잠시 쉬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가 개학하는 날에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여름방학이 끝날 때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께서는 봄방학이 끝날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두 분 모두 제가 학교를 조금 쉬라고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중학생이니 상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문상객들이 올 때마다 곡을 하면서 절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상복이 편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졌습니다.

하지만 상복을 벗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3일 동안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지내다가 우리들은 모두 할아버지의 고향인 남해로 갔습니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동네의 어른들과 인사를 하고 할머니께서 묻혀계시는 산으로 갔습니다. 할머니께서 묻혀계신 옆자리에 할아버지의 관이 들어갔습니다.

하필 그 때 비가 많이 와서 고생을 좀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빌며 기분좋게 상복을 벗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할아버지의 집으로 갔습니다. 마침 주말이라서 어른들께서도 시간이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남해에서 2일동안 더 있기로 했습니다.

2일동안 남해에서 지내면서 할아버지의 집을 깨끗히 청소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물건도 정리를 했습니다. 2일이 지나고 집에 가는 날이 되자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집에 남아서 일을 하고 가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저, 아버지, 삼촌네 가족, 량호네 가족도 함께 남해에 하루만 더 남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버지만 남기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도 이제 내일이면 다시 학교에 나가야합니다. 이제 진짜 드디어 3학년이 되네요.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학원도 많이 빠졌고 학교수업도 많이 빠졌습니다.

이제 3학년이 되면 그 만큼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어제는 주말이라 할아버지께서 계시는 병원에 가서 할아버지를 보살펴드리기로 했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할아버지께서는 힘이 많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감기까지 걸리셔서 열도 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밥을 잘 드시지 못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니까 정말 속상했습니다.

잠시후 아버지와 저는 점심을 먹으러 밖에 나갔습니다. 밖에서 육개장을 먹고 아버지는 일 때문에 먼저 가셨습니다.

저는 다시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에는 저와 할아버지, 이렇게 둘 뿐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많이 피곤하셨던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휴대폰으로 찍어 준 사진입니다.


저는 보조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으로 소설을 보고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결국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 후 잠에서 깨어나보니 할아버지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간호사 누나가 들어와서 할아버지의 체온을 재시더니 열이 다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보니 열이 다 내려간 것 같았습니다.

한숨 푹 주무시더니 감기가 말끔히 다 나으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까보다 훨씬 더 건강한 모습이셨습니다.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병실은 무지 더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밖에 나와서 자판기에서 차를 뽑아먹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산책을 해보려는 생각도 해봤지만 저녁식사를 드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점심 때와는 달리 밥을 아주 잘 드셨습니다. 감기가 나으시니 기력도 회복하신듯 했습니다. 저녁을 다 드신뒤 양치질도 하시고 약도 드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맛있는 떡갈비를 주문해놓으셨습니다.

내가 오늘 할아버지를 간병하느라 수고했다고 어머니가 사주신 떡갈비였습니다. 그 떡갈비까지 먹으니 정말 오늘 하루의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제가 할아버지를 계속 간병하면 할아버지께서도 금방 다 나으시겠죠?
설이 끝나고 저와 아버지는 할아버지댁에 남아서 할아버지를 보살펴 드렸습니다. 삼부자가 함께 남은 것입니다. 저는 할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그 일을 하고나니 왠지 엄청나게 뿌듯했습니다. 점심에는 백숙을 먹으러 아버지, 할아버지와 함께 나갔습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5분 정도 가서 백숙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곳은 아주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식당이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키운 토종닭을 삶아서 갖다주었습니다. 백숙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저는 백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때 먹은 백숙은 정말 맛있었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그렇게 맛있는 점심을 먹고 다시 할아버지댁에 돌아가서 저녁까지 먹고 할아버지의 옆에서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오랜만에 정말 편하게 주무셨습니다. 저는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아침을 먹고 마산으로 향했습니다. 마산에 도착해서 어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는데 주숙이 고모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시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다가 저와 어머니는 먼저 택시를 타고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회사에 일을 하러 가셨고 저는 학원에 가기 전 잠시 쉬기 위해서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2시간 쯤 뒤에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할아버지를 보살펴드리기 위해서 학원수업을 2일이나 빠졌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학원에 가서 더욱 더 열심히 해서 빨리 보충을 해야겠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설날이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설날과 만나게 되는 2일 전(2월 12일 금요일)에 병원에 계시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남해로 갔습니다.

저와 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저는 량호네 차를 타고 갔습니다. 남해에 가는동안 차가 많이 막혀서 늦게 도착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막히지 않아서 빨리 도착을 했습니다.

량호네 가족들은 우리들에게 인사를 하고 같은 남해에 있는 고모부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집에는 저와 할아버지, 어머니만 남게 되었습니다.

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새벽에 삼촌네 가족이 도착을 했습니다. 삼촌네 가족도 많이 피곤해서 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제가 잠에서 깨어나보니 삼촌과 숙모는 아직 주무시고 계셨고 사촌동생인 관희와 리나는 일어나서 놀고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침밥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관희와 리나를 봐서 매우 반가웠습니다. 잠시후 어머니가 아침밥을 차려 오셨습니다.

설 전날 저녁 제사를 마치고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찍은 사진입니다.


숙모와 삼촌도 일어나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도 많이 나아지셔서 밥을 맛있게 드셨습니다. 할아버지의 건강한 모습을 보니 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리나, 관희와 신나게 놀았습니다. 리나는 이번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관희는 이제 유치원에 들어갑니다.

저도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됩니다. 조금만 있으면 제 블로그 이름도 '마산 고딩 태윤이의 놀이터'로 바꿔야겠네요.

정말 시간은 쏜 화살과도 같다는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작년 설에 만나서 논 게 어제의 일같이 느껴지는데 또다시 이렇게 설이 찾아왔습니다.

시간이 정말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신나게 놀고있는데 아버지가 오후에 남해에 도착을 하셨습니다.

그리도 설 전날 밤에 어른들이 잠시 외출을 하셨습니다. 저는 관희와 리나를 데리고 신나게 놀았습니다. 컴퓨터도 하고 TV도 보고 뛰어 놀기도 하고 그런데 리나와 관희가 갑자기 졸리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놀자고 했는데 너무 잠이 온다고 했습니다. 저는 결국 관희와 리나를 먼저 재우고 하염없이 어른들은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계속 앉아있으니까 저도 결국 잠이 왔습니다. 저는 리나와 관희 옆에 누워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어른들은 모두 집에 계셨습니다.

드디어 설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상을 차리고 절을 한 뒤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렸습니다. 세뱃돈도 많이 받았습니다.

설날 다례를 지내고 난 뒤 가족들과 찍은 기념사진.


우리는 곧바로 마을에 있는 다른집에 계시는 어른들께도 세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마을 한 바퀴 돌고나서 우리는 산소로 갔습니다.

그곳은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께서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절을 하고 이번에는 할머니께서 계시는 산소로 갔습니다.

할아버지와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곳은 엄청 추웠습니다. 그래서 절을 한 번 하고 얼마있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잠시 후 기범이네 가족이 남해에 도착을 했습니다.

우리는 또 같이 놀다가 갑자기 량호가 생각났습니다. 량호네 가족은 원래 오늘 집으로 돌아오기로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후가 되었는데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동네 어른들께 세배를 하러 다니는 모습입니다.


저와 고모는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량호네 집까지 걸어갔습니다. 량호네 집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량호네 집에 가서 량호네 가족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고모와 기범이는 차에 자리도 없고 운동도 할 겸 걸어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기범이는 집에서 타고왔던 자전거를 타고갔습니다.

우리는 집으로 가서 차가운 몸을 따뜻한 방안에서 녹이고 다시 신나게 놀았습니다. 밤이 되자 봉주 형네 가족이 왔습니다.

나의 사촌형인 봉주 형은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습니다. 그렇게 설날을 또 보내고 설날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습니다.

설날 오후에는 날씨가 따뜻해져서 할아버지와 산책을 나갔습니다.


가족들은 거의 다 집으로 돌아가고 저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만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 내일 할아버지를 모시고 마산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번 설날도 정말 빠르게 지나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꽤 즐겁고 행복했던 설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을 보고계시는 분들은 설은 어땠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아버지와 산책을 하는 모습.

내 사촌동생 관희입니다.

남호와 리나, 관희, 량호, 할아버지, 그리고 저입니다.

오늘도 역시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할아버지께서 계시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너무 피곤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빨리 완치되기를 빌면서 힘을 내었습니다. 병원에 가니 할아버지께서는 여전히 누워계셨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일단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반가워 하셨습니다. 저는 일단 할아버지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비웠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병실의 창가 침대가 비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침대를 창가로 옮겼습니다. 창가로 옮기니 제가 있을 자리가 훨씬 넓어져서 좋았습니다.

창가로 옮긴 할아버지의 침대. 아버지가 찍은 사진.


아버지는 그 후 일 때문에 회사로 가셨습니다. 저는 어제처럼 병원에 남아서 할아버지의 옆을 지켰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시키는 심부름을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가 회사로 가시자 화장실로 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어제보다 훨씬 더 편하게 걸으셨습니다. 저는 점점 완치되어 가시는 할아버지를 보니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저는 할아버지 옆에 누워있는 동안 지루해서 문제집을 펼쳐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 질렸습니다.

그렇게 심심해 하고 있을 때 마침 점심식사가 왔습니다. 할아버지의 밥은 늘 죽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 부터는 죽이 아닌 보통 밥을 먹어도 된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또 아주머니께 공기밥을 달라고 했습니다. 아주머니께서는 천 원을 받으시고 공기밥 하나와 국, 그리고 수저를 주시면서 수저는 계속 가지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주머니의 말씀대로 밥을 다 먹고 수저를 깨끗이 씻어서 할아버지 옆에 놓아두었습니다. 내일은 할아버지께 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제가 어머니와 함께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치료를 받기 전까지는 할아버지 옆에 있고 싶습니다. 그래야 할아버지께서도 힘을 내셔서 빨리 완치가 되실테니...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께서 입원해 계신 병원으로 갔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침대에 누워계셨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일단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할아버지께서 하룻동안 마실 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양치질을 도와드렸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는 일 때문에 회사로 가셨습니다. 저는 병원에 남아서 할아버지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심부름도 해드리고 화장실에 가실 때 부축을 해드렸습니다.

어제 힘없이 누워계시던 할아버지. 오늘은 기력을 많이 회복하셨어요.

어제 할아버지께 갔을 때에는 다리에 힘이 없으셔서 휠체어를 타고 화장실에 가셨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서 아주 잘 걸으셨습니다.

확실히 어제보다 할아버지는 훨씬 좋으셨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나오는 죽을 드셨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밥을 드시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께서 다 드시면 병원 1층에 내려가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시는 어른들이 저에게 공기밥을 천 원에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밥을 나눠주시는 아주머니께 갔습니다.

그리고 밥을 살 수 있냐고 여쭤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께서는 할아버지 옆을 지키는 제가 기특하셨는지 공짜로 밥 한 공기와 반찬 몇 개를 주셨습니다.
 
저는 아주머니께 받은 음식들을 가져가서 할아버지의 반찬과 함께 맛있게 먹었습니다. 병원 음식이라서 그런지 고기반찬은 없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침대 옆에 있는 보조침대에 누워서 할아버지께 "저라도 옆에 있으니까 좋으시죠?"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좋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왠지 마음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지난 일요일은 제 할아버지의 생신입니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어제 할아버지께서 계시는 남해에 모여서 밥을 먹었습니다.

저는 일단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고모의 차를 타고 남해로 갔습니다. 우리가 남해에 도착했을때 삼촌의 가족도 도착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친척들도 많이 모였습니다. 우리들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횟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일단 자리에 앉아서 한 명씩 일어나서 할아버지께 생신을 축하드리는 한마디을 했습니다.

저는 제일 처음으로 일어나서 할아버지께 생신축하 드리고 오래오래 건강하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자리에 온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한 마디씩 했습니다.

우리는 맛있는 저녁을 먹었습니다. 특히 회를 아주 많이 먹었는데 역시 남해는 바닷가라서 회가 아주 맛있었습니다.

그렇게 밥을 먹고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저보고 식당 아주머니께 땡초를 좀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얼른 땡초를 받으러 갔습니다.

맨 앞 오른쪽에 브이(V)자를 하고 있는 아이가 제 사촌동생 관희입니다.


제가 땡초를 받아오는데 저의 사촌동생인 관희가 저를 따라왔습니다. 관희는 아직 5살밖에 되지 않아서 아주 귀여웠습니다.

저는 그런 관희에게 땡초를 권했습니다. 관희는 주저없이 땡초를 한 입 베어먹었습니다. 관희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다시 관희에게 땡초를 권했습니다. 그 때에도 관희는 땡초를 잘 먹었습니다. 저는 관희가 땡초를 먹는 것을 보고 별로 맵지 않을 것 같아서 저도 땡초를 한 입 베어먹었습니다.

그 때부터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땡초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게 매웠습니다. 저는 옆에서 뛰어놀고있는 관희를 보았습니다.

저는 관희가 아기라서 아직 미각 발달이 덜 되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땡초는 그야말로 입에서 불이 나는 음식이었습니다.

저는 매워서 물을 계속 마셨습니다. 하지만 물로는 진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때 땡초는 정말 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편 저의 그 모습을 보고있던 사촌 형인 '정우' 형은 갑자기 땡초를 집어들더니 크게 한 입 베어먹었습니다. 그 형은 군대를 갔다온지 얼마되지 않은 형이라서 별로 안 매워 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와도 사람의 입맛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준이 형은 저처럼 매워서 물과 음료수 등 눈에 보이는 액체는 최대한 많이 입속에 넣었습니다.

형은 그래도 진정이 안되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입으로 불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저는 저와 같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 재미있어서 제 옆에 있던 사촌동생 량호에게 땡초를 권했습니다.

량호는 한참동안 고민에 빠지더니 옆에서 자신의 혀를 증오하고있는 정우 형을 보고는 기겁을 하면서 딱잘라 거절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 량호에게 땡초를 권했습니다. 량호는 갑자기 사이다를 원 샷 하더니 땡초를 들고 남자답게 두 입을 베어먹었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예상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량호도 땡초가 매워서 수분을 보충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땡초가 왜 그렇게 매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을 굳게 하고 땡초를 하나 들고 아주 크게 한 입 베어먹었습니다. 저는 최대한 맛을 느끼지 않으려고 잘근잘근 씹어먹었습니다.

하지만 땡초의 공포는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덜 맵기는 커녕 아까 먹은 것 보다 3배는 더 매웠습니다. 저는 정말로 매워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신기했습니다. TV에서 매운 음식을 먹고 우는 장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 연출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매운 음식을 먹으면 눈물이 납니다. 정말 처음 알았습니다. 매운 음식이 나의 눈물샘을 자극할 줄이야...

저는 정말 어이가 없어서 관희에게 마지막으로 땡초를 권했습니다. 하지만 관희는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화를 내면서 그거 매워! 라고 말했습니다.

관희는 매운 맛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매운 맛이 조금 늦게 느껴졌던 것 입니다. 매운 맛도 다 사라지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있을때 갑자기 제 사촌동생 남호와 리나가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얼른 말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호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남호는 울면서 자신의 장난감 총이 리나가 던져서 부숴졌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일단 남호와 리나를 떼어놓았습니다.

남호는 저에게 장난감 총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일단 남호에게 밑에 내려가서 테이프를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남호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테이프를 빌리러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남호가 간 뒤 저는 장난감 총을 보고 난감했습니다.

총이 발사가 않되었던 것 입니다. 저는 총을 몇 번 만지작 만지작 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약간 위로 쏠린 스프링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 스프링을 가볍게 내렸습니다. 그러자 총은 다시 제 모습을 찾았습니다. 저는 그 때 남호가 무언가를 들고 저에게 왔습니다.

저는 남호에게 테이프를 들고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남호가 들고 온 것은 바로 '밴드' 였습니다. 저는 어리둥절 해서 남호에게 왜 밴드를 들고왔냐고 물었습니다.

이걸로 사람을 치료할 수는 있지만 장난감은 못하겠죠?


그러자 남호는 해맑게 이걸로 붙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게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저는 남호가 무척 기특했습니다.

잠시후 가족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할아버지의 집으로 가보니 다른 친척들이 많이 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친척들을 많이 만나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렇게 많이 친척들과 하룻밤을 잤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할아버지와 케익을 갔다놓고 생신 파티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친척들이 많이 와서 기분이 무척 좋으셨습니다. 저도 정달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회사에 가봐야 해서 일찍 마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가기 아쉬운지 친척들과 할아버지를 모두 모셔놓고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정말 재미있고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이번에 지리산을 다녀와서 아버지와 함께 외식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아직 유럽에 계셔서 저와 아버지만 밥을 같이 먹는 것이 익숙해졌습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나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비디오가게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비디오로 영화를 한 편 보고싶어서 비디오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보고싶은 영화는 터미네이터4였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는 이미 누가 빌려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다른 비디오를 빌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아버지께서 '워낭소리' 라는 영화를 고르셨습니다. 그 영화는 아주 슬픈 영화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아버지는 워낭소리 비디오를 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그 영화를 틀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는 영화라기 보다는 다큐멘터리 같았습니다. 그냥 늙은 소와 다리가 아프신 할아버지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도 꽤 탄탄한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옛날부터 다리가 불편해서 소가 끄는 수레에 타서 소와 함께 농사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만약 그 소가 없었더라면 할아버지는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소는 할아버지에게 아주 소중한 소죠. 그러던 어느날 소가 1년정도 밖에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의사에게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부정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혹시 몰라서 다른 소를 샀습니다. 그 소는 암소였고 곧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낳은 송아지도 암컷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결국 계속 그 늙은 소와 농사일을 했습니다. 그 늙은 소는 계속 지쳐만 갔고 어미소는 늙은 소를 계속 괴롭히고 송아지는 말을 너무 안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송아지는 결국 팔아버리고 늙은 소와 계속 일을 같이 했습니다. 하지만 소도 아주 많이 늙었지만 할아버지 또한 너무 늙고 다리에 무리도 많이 가서 더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결국 그 늙은 소를 팔기로 마음을 먹고 소시장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 소는 너무 늙었고 그 때는 광우병 걸린 미친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소값이 너무 많이 내려서 그 늙은 소를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소시장의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장사하는데에 방해가 된다고 쫒아내기까지 했습니다. 늙은 소는 자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고생하는 것 같아서 미안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왠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를 보면 시골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도 생각이 났습니다.

마지막에는 결국 그 늙은 소가 병이 들어서 죽어버립니다. 그 때 할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리며 "좋은 곳으로 가거라"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끝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소가 너무 불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죽은 소를 묻을 때에는 정말 슬펐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저는 많은 것을 느낀 것 같습니다.
워낭소리
감독 이충렬 (2008 / 한국)
출연 최원균, 이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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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였다. 나와 어머니, 아버지는 성탄절 기념으로 남해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갔다. 나는 할아버지를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

물론 할아버지께서도 무척 반가워하셨다. 우리는 할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주 행복했다. 그런데 내 사촌 동생인 량호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 내용은 바로 자기도 지금 남해의 일때문에 남해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량호는 내일 할아버지 댁에 올 수 있다고 했다.

량호는 나의 많은 사촌들 중에서도 가장 친한 사촌동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척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어머니와 아버지는 일때문에 다시 마산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 댁에 월요일(12월 28일)까지 더 있기로 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마트로 갔다. 거기에서 우리는 내가 할아버지 댁에서 있을동안 먹을 간식들을 샀다.

그리고 우리는 남해의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그리고 잠시후 그곳으로 량호와 량호의 아버지인 고모부께서 탄 차가 나타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마산으로 돌아가고 나와 량호, 이렇게 둘만 남해로 돌아갔다. 남해에 가보니 할아버지께서는 집에 없으셨다.

지난 봄 할아버지와 순천 드라마 촬영장에서...


할아버지께서는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멀리 갔다오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와 량호는 함께 게임도 하고 TV도 보고 같이 자전거도 타면서 같이 밥을 먹으며 오랜만에 함께 신나게 놀았다.그리고 잠시후 할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량호의 동생인 남호까지 할아버지 댁에 와서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창원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할아버지와 나만 남해에 남아있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위해 밥도 차려드리고 설거지도 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기분이 매우 뿌듯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할아버지와 함께 잠을 잤다. 나는 할아버지가 좋았다. 나는 어릴때 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좋을수 밖에 없다.

지금은 비록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나는 할머니를 사랑한다. 그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다음날(12월 27일)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할아버지께서 주무시는 옆방에서 TV를 보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께서 방에서 나오셔서 이제 그만 자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TV를 끄고 곧바로 할아버지의 옆에 누웠다.

그렇게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내일이면 이제 할아버지를 못본다는 생각에 그만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걱정하실까봐 혼자 조용히 울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더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학원을 가야하기 때문에 그럴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더욱 슬펐다.

다음날 나는 아침일찍 일어나서 아침 9시 30분 차를 타고 마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버스 표를 살 때 할아버지께서 할아버지의 돈으로 표를 구입했다.

나는 어머니가 표를 사라고 주신 돈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께 내 돈으로 표를 사도 된다고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그 돈은 내가 주는 용돈이다." 라고 하셨다.

그 순간 나는 할아버지께 정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성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의 주머니에 할아버지 몰래 만 원을 넣어드렸다.

앞으로도 할아버지와 자주 만나면 좋겠다. 할아버지 오래오래 사세요.

오늘 할아버지께서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많이 아프신 줄 알고 엄청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학원도 빼먹고 할아버지께서 입원을 하신 병원으로 학교를 마치고 바로 갔다.

할아버지께서는 생각보다 건강하셨고 기침과 다리가 조금 아프실 뿐이지 다행히도 그렇게 크게 아프시지는 않으셨다.

나는 어릴 때 5살까지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 키워졌다. 그래서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날에 이불을 박혀서 거의 한 시간 동안 펑펑 울었다. 

할머니 제사 때 자리에 앉아계시는 할아버지와 나, 그리고 고모님들.


그래서 이번에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가 내심 엄청 걱정했는데 할아버지는 생각보다 건강하셨다. 정말 다행이였다. 아마 할아버지께서 만약에 돌아가신다면 나는 사는게 엄청 힘들어 질 것이다. 나는 그만큼 할아버지를 사랑한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계시면 좋겠다. 물론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그게 나의 바램이다. 나는 할머니의 제사를 지낼 때도 절을 하면서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게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아마 할머니께서는 그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할아버지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할아버지 사랑해요.
나는 이번주 목요일에 나혼자서 버스를 타고 할어버지께서 계시는 남해로 갔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일이 많아서 오지 못하셨다. 버스에서 내리고 잠시후 삼촌이 할아버지와 함께 왔다.
 
나는 삼촌의 차를 타고 바로 휴양림으로 갔다. 나는 오랜만에 귀여운 사촌동생들을 만나서 정말 좋았다. 물론 내 동생들도 나를 무척 반가워 했다. 친동생이 없어도 사촌들이 많아 참 좋다.


휴양림에 내리고 보니 고모네 가족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일단 텐트를 치고 점심으로 삼겹살과 라면을 끓여먹었다. 그리고 잠시 쉬다가 근처에 있는 풀장으로 갔다. 나는 수영복이 없어서 그냥 반바지로 갈아입고 물에 들어갔다.

햇빛이 쨍쨍한 여름에 시원한 수영장에 들어가는 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하지만 햇빛이 잠시 후에 구름에 가려져서 너무 추워졌다. 그래서 결국 나는 물속에서 나와서 다시 텐트로 갔다. 그리고 우리는 저녁으로 맛있는 백숙을 해먹었다. 인삼과 닭도 직접 사온 것 이었다. 

우리는 백숙을 맛있게 다먹은 뒤에 잠시 소화를 시키다가 다시 수영장에 가서 재미있게 물놀이를 했다. 이번에는 햇빛도 쨍쨍해서 물이 별로 차갑지 않고 시원했다.

나와 내 동생들은 다시 물에서 나와서 옷을 갈아입고 잠자리를 잡으러 갔다. 나는 잠자리채로 잠자리를 엄청 많이 잡아주었다. 내 동생들도 잠자리를 많이 잡았다. 우리는 잡은 잠자리를 집에 가서 모두 다시 놓아주었다.
 
우리는 집에 와서 일단 목욕을 했다. 수영장의 물이 더러우니까 당연히 해야 했다. 목욕을 마치고 우리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을 하다가 량호와 장기를 두었다. 량호는 고모부의 도움을 받아서 나를 패배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졸병 하나만 더 잡았어도 내가 이길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옆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고모와 숙모가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나는 아침을 맛있게 먹고 동생들과 놀았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려고 했는대 밖에 비가 엄청 왔다. 그래서 결국 집안에서 TV를 보거나 또 장기를 두고, 컴퓨터게임을 하면서 놀았다.

그렇게 놀다보니 점심 때가 되었다. 점심은 맛있는 카레밥이었다. 나는 그 날 아침에 블로그에 카레에 대한 글을 올려서 카레가 무척 반가웠다.

나는 맛있게 점심을 먹고 삼촌의 차를 타고 할아버지와 동생들에게 인사를 하고 남해를 떠났다. 나는 이번에 할아버지와 친척들을 오랜만에 만난게 제일 좋았다. 이렇게 친척들끼리 모여서 같이 휴가를 즐기니까 정말 좋았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많이 있으면 좋겠다.

                                     제 동생들 입니다. 사진은 전부 제 휴대폰으로 찍었습니다.
이번에 가족들과 오랜만에 여행을 갔다. 간 곳은 순천으로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삼촌, 숙모, 사촌동생들  이렇게 나까지 합쳐서 모두 8명이 함께 갔다. 나는 일단 학교에서 3교시까지 수업을 받고 조퇴를 했다. 그 때 친구들이 엄청 부러워했다.

나는 학교에서 바로 집으로 와서 짐을 챙겨서 아버지께서 다니시는 회사로 갔다. 거기에는 아버지께서 일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나를 보시고는 바로 일하는 것을 중단하고 나와 함께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우리는 김밥을 사서 순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나는 오랜만에 버스안에서 실컷 잤다. 자고 일어나보니 이미 순천에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서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촌네는 지금 할아버지를 모시고 순천으로 오는 중이였다. 우리는 삼촌네가 오는동안근처 가게에서 토스트와 음료수를 사서 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우리는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삼촌네가 도착했다. 나는 오랜만에 귀여운 사촌동생들을 만나서 매우 반가웠다.

할아버지와 순천 드라마촬영지에서.


우리는 차를 타고 먼저 순천에 유명한 '드라마 촬영지' 로 갔다. 그곳은 60~70년대를 배경으로 지어놓은 곳으로 그곳에서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찍혀졌다. 대표적으로 '에덴의 동쪽', '님은 먼곳에', '사랑과 야망' 등이 그 예이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서 드라마 촬영지로 들어갔다.

그곳은 정말 넓었다. 그곳에는 옛날의 풍경이 고스란히 있었다. 내가 즐겨보는 '엄마는 단짝친구' 에 나오는 풍경과 매우 비슷했다. 그리고 어른들은 잠시 어릴 적 추억으로 빠져드신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추억에 잠기는 모습을 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내 귀여운 사촌동생들.


어른들은 지어놓은 건물 하나하나를 보면서 몹시 감탄했다. 하지만 겉모습만 똑같이 만들어 놓았을 뿐 건물 안의 내부는 그냥 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멋있었다. 정말 동네를 하나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잘 만들었다.

우리 가족이 묵었던 숙소.


우리는 그렇게 드라마 촬영지에서 시간을 보내고 짐을 내려놓기 위해 숙소로 갔다. 숙소에 짐들을 내려놓고 숙소 근처에 있는 '순천만' 으로 갔다. 우리는 거기에서 배를 타고 순천만을 한바퀴 돌았다. 바람이 시원해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특히 나의 사촌동생들이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순천만에서 배를 타고 본 모습.


우리는 배에서 내려서 저녁을 먹고 다시 숙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버지와 삼촌이 내일 아침으로 먹을 라면과 과자등을 사오셨다. 우리는 과자와 오징어를 먹다가 내일 여행을 위해서 잠이 들었다.

이번에 증조할머니 제사를 지내러 할아버지댁에 다녀왔다. 마산에서 진주 가는 버스를 타고, 진주에서 다시 택시로 하동군 진교까지 갔을 때, 진교에서 삼촌이 차를 가지고 기다리고 계셨다.

나와 부모님은 삼촌차를 타고 할아버지댁으로 가기 전에 먼저 어떤 장례식장으로 갔다. 왜 갔냐하면 바로 나의 사촌동생인 량호, 남호의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거기에는 고모와 고모부도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밥을 먹고 다시 차를 타고 할아버지댁으로 갔다. 거기에는 나의 사촌 여동생들이 밤이라서 그런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자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할아버지가 제사를 지내면서 제문을 읽고 계시다.


다음날 밤 제사를 지낸 후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과 숙모 등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혼자 할아버지댁에 남겠다고 말했다. 학교가 봄방학을 하고 있는데다가 할아버지와 함께 더 있고싶어서 하루 더 있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단둘이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할아버지의 친구분들과 이웃 할머지들께서 와계셨다. 나는 그 분들과 아침을 먹고나서 컴퓨터게임을 하다가 어른들이 모두 돌아 가시고 난 뒤, 할아버지와 같이 TV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할아버지댁에서 계속 놀다가 점심을 먹고 나서 집에 갈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이대로 가버리면 할아버지께서 다시 혼자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결국 어머니께 전화를 해서 할아버지댁에 하루만 더 있겠다며 허락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나. 작년 여름 경주에 가족여행을 가서 아버지가 찍어주신 사진이다.


그리고 다음날 어제와 다름 없이 놀다가 점심을 먹고 짐을 싸서 할아버지께 눈물겨운 작별인사를 하고 버스를 타고 마산 집으로 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로 내가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할아버지댁에 할아버지 몰래 한번 더 찾아간다는 이야기였다. 아마 그러면 할아버지께서 무척 좋아하실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설날이 다가온다. 우리는 남해에 있는 할아버지의 집으로 갈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할머니께서 먼저 돌아가셔서 매일 혼자 계신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가 많이 외로우실 것 같다. 그러니까 명절이나 다른 행사가 있는 날에라도 할아버지댁을 자주 방문해야 내 마음이 편하다.

나는 5살 때까지 할아버지댁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나를 무척 예뻐하신다. 나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매우 좋다.

할아버지와 나. 작년 여름 경주에 가족여행을 가서 아버지가 찍어주신 사진이다.


그러나 나는 5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어머니와 창원으로 이사를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리워 하면서 유치원을 다니다가 내가 태어난 마산으로 다시 이사를 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께서 내가 4학년 때 돌아가셨다. 나는 너무 슬프고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그 때부터 혼자 사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외로우실 것 같아서 할아버지댁을 방문할 때마다 할아버지를 꼭 안아드렸다.

할아버지댁에서 본 마을 앞 풍경. 느티나무는 할아버지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너무 외로우실 것 같아서 나라도 할아버지께 전화를 자주 드려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요즘 내가 공부 때문에 많이 바빠서 할아버지께 전화를 드리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고 만다. 나는 할아버지께 정말 죄송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학이니까 앞으로 남은 방학날 만큼은 꼭 자주 전화를 드리겠다.


이번 설날에 할아버지댁을 방문하여 할아버지께 정말 잘해드리겠다. 그래야 할아버지의 외로움이 조금이라도 없어질테니...

강풀 님의 순정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읽고

이번에 나는 아버지께서 빌려오신 만화작가 '강풀'님의 순정만화시리즈 '그대를 사랑합니다' 전 권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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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내용은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의 감동적인 사랑과 우정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정말 그 책은 감동적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그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신다.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매우 감동을 받았다.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김만석'이라는 어떤 할아버지께서 아내를 암으로 잃고 아내가 먹고싶어 하던 '우유' 배달을 하며 사시다가 우유배달을 하면서 매일 마주치는 '송씨' 할머니에게 실수로 돌을 날려서 '송씨' 할머니께서 넘어지게 되고 '송씨' 할머니께서 끌고 오시던 수레 안에 있던 물건들이 모조리 쏟아지게 된다. '김만석' 할아버지는 '송씨' 할머니에게 미안해서 물건들을 전부 주워주고 '송씨' 할머니께 미안함의 표시로 우유를 하나 주고 가신다.

다음날 '김만석' 할아버지께서는 우유배달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시던 중 '송씨' 할머니를 다시 만나시게 된다. '김만석' 할아버지께서는 눈이 많이 오는데도 무거운 수레를 끌고 다니는 '송씨' 할머니가 미끄러워서 넘어질까봐 운동을 한다고 '송씨' 할머니뒤를 따라가며 몰래 수레의 뒤를 잡아주신다. '송씨' 할머니께서는 '김만석' 할아버지께서 가신 뒤에 수레의 뒤에 눈이 녹아있는 것을 보고 감동를 받으신다.

어느날 '김만석' 할아버지께서는 어김없이 '송씨' 할머니의 수레를 잡아주시다가 잠깐 쉬면서 '송씨' 할머니의 과거에 대해서 알게 된다. 엄마를 버리고 '김기득' 씨와 집을 나와서 서울에서 '김기득' 씨는 매일 술만 마시고 '송씨' 할머니는 계속 힘든 일을 한다. 그리고 '김기득' 씨는 매일 '송씨' 할머니를 폭행까지 한다. 그리고 '송씨' 할머니는 아기를 낳게 된다. 하지만 '김기득' 씨는 결국 '송씨' 할머니 혼자 남겨두고 집을 나와버린다. '송씨' 할머니는 엄청 어렵게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송씨' 할머니는 이름도 없다는 것도 알게 되자 '김만석' 할아버지는 '송씨' 할머니가 불쌍하게 느껴진다.

'김만석' 할아버지께서는 '송씨' 할머니를 좋아하게 되셨다. 그래서 '김만석' 할아버지께서는 '송씨' 할머니에게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송씨' 할머니는 글을 모르셨다. 그래서 '송씨' 할머니는 고민을 하시다가 결국 주차장을 관리하고 계시는 '장군봉'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편지의 내용을 읽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내용은 알게 되었지만 만날 시간이 한참 지나서 '송씨' 할머니는 당장 만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김만석'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김만석' 할아버지께서는 '송씨' 할머니가 나오지 않아서 금방 돌아갔다가 놀다가 오면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라고 말하셨다. 하지만 '송씨' 할머니는 밑에 있는 수 많은 발자국들을 보고 '김만석' 할아버지가 엄청 오래 기다린 것을 알고 감동을 받으셨다.

'김만석' 할아버지는 '송씨' 할머니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편지장에 만날 곳과 만날 시간을 그림으로 그려서 '송씨' 할머니에게 주셨다. 그래서 '김만석' 할아버지와 '송씨' 할머니는 서로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딱히 갈데는 없었다. 그래도 그 후로 '김만석' 할아버지는 '송씨' 할머니와 많이 친해지셨다.

'김만석' 할아버지는 자신의 손녀딸이 다니고 있는 동사무소에 가서 '송씨' 할머니를 '송이뿐'이라는 이름으로 등록하고 증명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송이뿐' 할머니는 '장군봉' 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셨다. 그 것을 본 '김만석' 할아버지는 질투가 나서 '장군봉' 할아버지의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커피를 얻어 마시고 '장군봉' 할아버지와 친해지게 되셨다.

그 후 '김만석' 할아버지는 '송이뿐' 할머니에게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얼마 후 머리핀을 선물해주셨다. '송이뿐' 할머니는 무척 기뻐하셨다. 그렇게 '김만석' 할아버지와 '송이뿐' 할머니는 더욱 더 친해져 갔다.

'송이뿐' 할머니는 '김만석' 할아버지에게 고마워서 가죽장갑을 사주신다. '김만석' 할아버지는 너무나 기뻐서 온동네에 자랑하고 다니신다. '김만석' 할아버지는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여도 계속 그 장갑을 끼고 다니신다.

혼자 계신 우리 할아버지가 자꾸 생각났다

그 후 치매에 걸리신 '장군봉' 할아버지의 아내께서는 혈변과 구토 등을 하고 돌아가실 때가 다 되셨다. '장군봉' 할아버지는 두려움이 많으신 자신의 아내를 혼자 보내시지 않으려고 '김만석' 할아버지와 '송이뿐' 할머니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고 편지와 열쇠 두 개를 남기신 채 집에 창문사이의 틈을 모두 테이프로 막고 가스밸브를 열어놓으신 채로 주무신다. 결국 '장군봉' 할아버지와 그의 아내는 같은 날에 같이 돌아가신다.

'김만석' 할아버지는 '장군봉'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편지를 보고 열쇠로 '장군봉'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서 편지에 적힌대로 테이프같은 흔적을 모두 치우고 '장군봉' 할아버지와 그의 아내가 돌아가신 것을 사고로 남겨지게 하셨다.

그 후 '김만석' 할아버지는 '송이뿐' 할머니의 고향인 강원도의 시골에 '송이뿐' 할머니를 데려다 주기 위하여 '장군봉'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또 하나의 열쇠로 '장군봉' 할아버지의 차를 타고 간다. 가던 도중에 '송이뿐' 할머니는 '김만석'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죽고 싶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김만석'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죽고 싶다고 하신다.

'김만석' 할아버지는 '송이뿐' 할머니를 고향에 데려다 주시고 우유배달을 계속 하시다가 몸이 쇠약해져서 '송이뿐' 할머니께서 선물해주신 가죽장갑을 끼신 채로 웃으면서 돌아가셨다.

나는 이 책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지만 특히 주인공이신 '김만석' 할아버지께서 '송이뿐' 할머니의 수레를 뒤에서 몰래 잡아 주시는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였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운동을 하신다며 무뚝뚝하게 '송이뿐' 할머니의 뒤를 따라 가시지만 속으로는 '송이뿐' 할머니께서 넘어지실까봐 수레의 뒤를 잡아주신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역시 사랑이란 너무 아름다운 것 같다. 나는 이 때까지 어르신들은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없으신 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사랑에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 할아버지.


이 책을 읽으면서 남해에 혼자 계신 할아버지가 계속 생각났다. 할아버지께서 너무 외로우실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할아버지댁에는 고모 가족이 와계셨다. 너무 기뻤다. 당분간 할아버지께서 외로우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고모에게 감사했다.

나도 할아버지댁에 자주 가야 되는데 못가서 정말 할아버지께 죄송하다. 앞으로는 비록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하지만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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