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지리산에 가서 세석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난 다음의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지리산에 다녀와서 블로그를 쓰는 것은 마지막일 듯 하네요.

세석 대피소에서 우리는 다행히 꽤 따뜻하게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짐을 싸고 드디어 지리산에서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보니 안개가 무지 많이 껴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조금만 있다가 내려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최악의 경우에는 세석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가야한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30분쯤을 기다려보니 안개가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세석대피소에서 출발하기 전.


그래서 아버지와 저는 얼른 짐을 들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세석 대피소에서 나오니 눈이 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차가운 눈들이 제 목으로 들어가니까 정말로 죽을 맛 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눈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차가워서 싫어지네요.

우리는 그렇게 차가운 눈을 맞으며 어제 우리가 왔던 길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림코스로 빠져서 내려갔습니다.

이런 눈길을 헤치고 걸어내려왔습니다.


길은 다 내리막길이라서 힘도 별로 안들고 편하게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경사가 넘 심해서 아이젠이 없었더라면 미끄러워서 아주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1시간쯤 걸으니 반은 내려왔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앉아서 쉬다가 다시 출발을 했습니다. 내려가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제 우리가 걸었던 거리에 비하면 비교도 안되지만 그래도 멀기는 멀었습니다. 다리가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눈은 그쳐서 춥지는 않았지만 힘들어서 얼른 집에 가고싶다는 생각밖에 들지않았습니다. 그렇게 또 1시간 30분쯤을 걷다보니 드디어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거림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함박웃음.


저는 기분이 좋아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눈이 녹아 물이 있는 자리에서 미끄러져서 엉덩방아을 찧은 것이 아닙니까?

정말 아팠습니다. 하지만 산에서 다 내려왔다는 기분에 아픔은 금방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근처 식당에 가서 맛있는 백숙을 먹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몇 시간 뒤 우리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침대에 널부러져서 뒹굴었습니다. 그 느낌은 정말 지옥에서 천국으로 온 행복한 느낌이었습니다.

힘든 여행을 다녀오면 집으로 돌아왔을때 그 때의 편안함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요?
지리산을 등산할 때 나는 아쉬웠던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일단 우리는 집에 라면을 끓여먹을 코펠과 버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까먹고 코펠과 버너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코펠과 버너를 가져왔다면 뜨거운 라면을 추운 산에서 맛있게 먹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라면의 기운으로 힘차게 등산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도 저도 무척 아쉬웠했습니다.

지리산 삼신봉 정상에서.


그리고 우리가 세석 대피소로 들어갔을때 발이 너무 시려웠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핫팩으로 자신들의 발을 문지르고 있더군요.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사실 우리집에도 핫팩은 있었습니다. 만약 그 핫팩을 등산하는데 가져왔다면 보다 더욱 따뜻하고 덜 힘들게 등산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석 대피소에서 정말 맛없는 저녁을 먹었습니다. 햇반에 햄이랑 참치... 햄은 먹을만 했는데 참치는 너무 차가워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밥을 먹을 수 있는 젓가락 또한 없었습니다. 챙겨오지 않았던 것이죠.

우리가 지리산 세석대피소에서 먹은 저녁식사.


우리는 세석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잘 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젓가락을 챙겨오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나무젓가락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거쳐서 드디어 나무젓가락을 빌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무젓가락을 빌려준 사람들이 고기를 구워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맛있게 구워지는 고기들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제가 먹을 햇반과 햄, 참치를 보았습니다.

다른 분들은 다들 버너와 코펠을 가져와 맛있는 저녁을 지어 먹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맛있게 익은 고기를 먹고 싶었는데 현실은 전부 인스턴트 음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녁을 대충 먹고 우리는 거림코스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주먹밥을 파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원래 계획대로 거림코스에서 등산을 시작했다면 맛있는 주먹밥을 사서 올라가 맛있게 먹었을 텐데...

그나마 아이젠과 스패츠, 그리고 방한장갑을 준비해간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이번 여행은 아쉬웠던 일이 참 많았습니다. 물론 이렇게 아쉬운 일이 많고 계획대로 잘 진행되지 않은 여행은 기억에도 잘 남을 것 입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의 교훈은 여행을 갈 때 사전계획을 잘하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리산에서 등산을 할 때 저는 계속 길을 못찾아서 엉뚱한 곳으로 가고는 했습니다. 그 때마다 아버지께서 바른 길을 찾아주셨죠.

저는 아버지께서 어떻게 바른 길을 잘 찾는지 여쭤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보면서 길을 찾아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지나온 길에 모두 이미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저도 이제부터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잘 보고 길을 찾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눈때문에 발자국이 지워진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는 사람들이 나뭇가지에 길을 알려주는 끈을 묶어 놓았습니다.

나는 발자국이나 그런 끈 같은 표시들을 잘 보고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안전하게 등산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그런 표시들을 남겨주신 사람들께 감사했습니다.

아버지가 찍은 이정표 사진. 우리는 청학동에서 세석대피소까지 10km를 걸었다.


하지만 그런 표시들이 아예 없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런 곳은 이정표가 있었습니다. 그 이정표에는 지금까지 온 거리와 남은 거리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이정표를 보았을 때에는 1km도 오지 않아서 엄청 실망했지만 점점 더 가면서 이정표를 많이 마주치니까 그 이정표에 있는 남은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정표가 나올 때 마다 무척 기대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그 만큼 목적지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니까 남은 거리가 줄어들수록 기분이 뿌듯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걸어서 다리가 점점 더 아파오는데 2km정도 남았다는 것을 보고는 정말 기분이 나빴습니다. 해가 져서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데 2km나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엄청 싫었죠.

날씨가 추워지고 다리는 아파와서 이정표의 남은 거리를 볼 때마다 점점 더 짜증이 났습니다. 기분은 엄청나게 많이 걸은 것 같은데 정작 실제로 간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석대피소가 500m 남았다는 마지막 이정표.


하지만 목적지가 500m 남았다는 마지막 이정표를 보았을 때에는 기분이 달랐습니다. 지금까지의 나빴던 기분은 전부 사라지고 목적지인 세석 대피소에 가서 편안하게 쉴 수 있다는 기대감만이 존재했습니다.

어쨌든 사람들의 발자국이나 사람들이 길을 표시해 놓은 끈, 이정표가 없었더라면 지리산의 등산을 더 힘든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소중한 표시들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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