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버지와 저녁을 먹는데, 제가 막걸리를 주문해 마셨습니다. 아버지는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저를 갑자기 다그치셨습니다. 제가 마시고 있던 막걸리가 생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생탁 노동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아는지 물어보셨고, 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잘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집에 가서 생탁 노동자들에 대해 찾아보니 정말 말이 안나왔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생탁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노예라고 표현하던데 그 말이 정말 과장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생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침, 점심을 회사에서 먹는데, 한 끼 식사가 1인당 450원이라고 합니다. 일요일에 일을 나오면 그 식사조차 주지 않고 고구마나 삶은 달걀을 한 개씩 나눠준다고 합니다.


게다가 휴일에 일을 나와도 휴일수당도 주지 않는다고 하네요. 주 5일 근무는 커녕 한 달에 한 번도 제대로 쉬기 힘들고, 장례식이나 부모님 팔순 때에도 예외없이 근무하게 한답니다. 


사규에 1년에 80% 이상 근무하면 연차 휴가를 준다고 해놓고 연차를 사용하지 않으면 자동소멸된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생탁 노동자들은 전혀 알지도 못한채 일했다고 합니다. 


버스가 다니지도 않는 새벽 4시에 버스비를 주면서 출근하라고 하고 심야수당도 없고, 이것들 이외에도 작업 환경과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정말 터무니없는 곳이 바로 부산의 막걸리 생탁이었습니다. 


부산 생탁의 노동자 지옥을 잘 보여주는 만화가 있기도 합니다. http://www.ziksir.com/ziksir/view/1484


생탁의 노동자들은 현재 1년 동안이나 파업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회사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국회의원조차 외면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상식적인 노동환경인데, 그 '상식'조차 지켜주지 않는 회사가 정말 무엇을 위한 회사일까요? 그러면서 사장들을 자기 몫을 다 챙기고 살겠죠. 자신들이 조금만 욕심을 버리면 될텐데.. 



저도 아르바이트 정도는 해본 적이 있는데, 근무환경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원들에게 대한 대우는 두말 할 필요도 없죠. 일할 맛이 나야 능률이 생기고 회사도 더 발전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걸까요?


이런 생탁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잘 몰라서 생탁을 먹었으니까요.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아는 게 참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생탁의 노사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절대 마시지 말아야겠습니다. 생탁말고도 앞으로 뭔가를 소비하거나 선택할 때 충분히 알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인도에서 느낀 것은 자급자족의 삶만이 아닙니다. 사실 무인도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낀 감정은 생명의 위협으로 인한 공포감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인도에서의 자유시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무인도에 가게 된 경위  
http://kimty.tistory.com/536

무인도에서 잡은 물고기나 조개류 등으로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고 각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낚시를 하는 사람, 낮잠을 자는 사람,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사람 등 각자만의 방법으로 무인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런 친구들의 모습을 촬영하러 다녔습니다
. 낚시를 하고 있던 현규는 바다에 낚시추가 돌에 계속 걸려서 어느새 세 개째 날려먹었습니다. !? 생각해보니 이제 선생님의 낚시추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제대로 된 식량을 구할 희망이 있는 낚싯대를 모두 탕진한 현규는 좌절에 빠지고 마지막 남은 낚싯대로 선생님은 여전히 오징어를 낚기 위해 낚싯대를 던져놓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재호는 낚시를 하다가 바다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림을 그리고, 소열과 재경, 지호는 낚시와 요리에 지쳐 텐트에 누워 부족한 잠을 채웁니다텐트가 불편했던 지우는 언덕위에서 낭만적인 낮잠을 청하는데, 계속 뭔가 불안한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밀물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 ‘설마 우리 텐트까지 들어오진 않겠지?’하고 별 신경을 쓰고 있지 않고 있었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 일이 정말로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강풍이 불어 닥치고 거의 해일 수준의 파도가 우리가 있는 무인도를 덮쳤습니다. 작은 규모였습니다. 그래도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반쯤 무너져 있는 이도한 선생님의 텐트가 남아있었습니다.


당연히 이도한 선생님의 짐은 모두 바닷물에 젖어버렸습니다
. 가장 큰 일은 선생님의 유일한 핸드폰이 바닷물에 잠겨 버린 것입니다. 소금물이라 고쳐지지도 않았고, 비상시에 무인도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사라졌습니다.

텐트에서 자다가 파도가 덮치는 것을 느낀 소열은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하여 단 2초만에 자신이 우선적으로 챙겨야 하는 카메라, 가방, 노트북 등을 가지고 파도를 피해 텐트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낚시를 하다가 돌아온 선생님은 구입한지 3일밖에 되지 않은 최신폰이라며 멘붕에 빠지셨고, 저를 비롯한 나머지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 때 마침
, 영화처럼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고, 우리 8명의 모두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때문에 텐트 안에 있어야 하는데, 파도는 계속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빨리 텐트를 다른 자리로 옮기지 않으면, 바다에 잠길 상황이었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 텐트를 분해하고 모든 짐을 챙겨 파도가 닿지 않는 언덕 위로 올라갔습니다.

언덕 위에는 웅덩이가 많아 빗물이 고이고 있었습니다. 최대한 웅덩이가 없는 곳을 찾아 텐트를 다시 쳤습니다한 번 쳐본 텐트라서 쉽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태풍을 연상케 하는 지속적인 강풍과 비가 우리를 괴롭혔기 때문에 오히려 더 힘겨웠습니다.


텐트를 치는 동안 정말 설상가상이라고 할 정도로 수많은 불행들이 저희를 덮쳤습니다
. 몇 가지 짐들이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가방이 바다에 잠겨 여벌옷이 다 젖어버리거나, 생수와 텐트를 고정할 돌이 언덕 밑으로 떨어져 버리는 등의 깨알같은 재앙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텐트를 다 치고 나서도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서 금방이라도 텐트가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사람이 안에 없으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아 모두 텐트 안에 들어가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재호가 선생님 몰래 핸드폰을 가져와서 당장 다음날 무인도를 빠져나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태풍이 불어 닥치는 이 무인도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 강풍으로 인해 언제 텐트가 날아갈지 모르는 상황에 텐트를 다시 치느라 체력이 바닥나서 배도 너무 고팠습니다선생님이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초코바 8개를 뜯어 먹고, 재호가 폰과 함께 몰래 가져온 빵 하나를 8명이 나눠먹었습니다.

모두들 그냥 잠이나 자자고 해서 다들 잠을 청하는데, 저는 여벌옷이 바닷물에 젖은 관계로 후드티 하나만 입은 상황이라 너무 추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잠도 오지 않았고, 그냥 밖에 나와 운동이나 했습니다. 하지만 운동을 하기에는 이미 몸이 완벽하게 지친 상태였고, 정말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바다를 보며 도대체 뭐가 잘못 된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아침에 부지도에 올 때 선장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선장님이 저희들을 데려다 준 곳은 부지도의 반대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곳은 좁아서 생활하기 불편하고, 자갈이 없어서 무인도 느낌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섬 반대편에서 머물기로 하여 지금 이렇게 된 것입니다.

만약 선장님이 권했던 곳에서 머물렀더라면, 바람을 등지고 있기에 강풍에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파도가 심하게 들어와도 지형이 높아서 텐트가 잠길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첫 번째 실수입니다. 두 번째는 지우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무인도에 도착했을 때 지우는 텐트를 우리가 현재 있는 언덕 위에 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언덕위에서 웅덩이가 많다는 이유로 언덕 밑에 텐트를 쳤었고, 결국 짐의 절반을 바닷물에 맡기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습니다하지만 처음부터 무인도 체험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한 제가 가장 문제라는 본질적인 답에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들 바뀌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밖에 있어도 계속 추웠기 때문에 어떻게든 잠을 자려고 해보았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엄청난 강풍 소리가 제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강풍으로 텐트가 무너지고 저는 할 수 없이 잠자리를 옮겼습니다.

재경이 텐트의 친구들에게 최대한 붙어서 추위를 이겨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하지만 몸의 한군데가 추우면 몸 전체가 춥게 느껴지는 것! 다리가 지나치게 진 재경이 때문에 텐트 문이 계속 열리고 발부터 시작해서 온 몸으로 한기가 올라왔습니다.

10월이 그렇게 추울 줄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최대한 참고 참아서 조금 자고 일어났더니 저녁 11... 시간이 미칠 정도로 늦게 갔습니다.

이대로 죽는 건가?', '난 여기 왜 왔는가?', '내일 우리는 무인도에서 나갈 수 있는 것인가?' 텐트 안에서 추위에 떠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지나갔습니다.

정말 죽고 싶을 정로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미치게 잠자기를 원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고, 허기짐과 추위에 지쳐 거의 기절하듯이 잠에 겨우겨우 들었습니다.


아침에 깨어나니
6시 정도였고, 다시 살을 깍는 듯한 추위와 대면했습니다. 모닥불이라도 피워보려고 해봤지만 어젯밤에 내린 비의 영향으로 나무들이 몽땅 젖어서 불이 붙지 않았습니다.


추위에 떨며
1시간을 보내다가 다른 친구들도 일어나서 함께 텐트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재호의 폰으로 선장님께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다행이 안전하게 구조? 되었습니다.



육지에 도착하고 곧바로 과자를 사먹었습니다
. 강냉이를 씹으며 통영에 있는 소열이 집에 가서 짜장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다같이 목욕탕으로 가서 그 동안 무인도에서 혹사시킨 자신의 몸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씻었습니다.
 

그러고 마산으로 돌아가 선생님이 사주시는 맛있는 저녁밥을 먹으며 우리들의 문제점을 분석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지만 역시 모두들 하나같이 무인도에 간 것 자체가 문제라며 앞으로는 함부로 위험한 일을 얕잡아 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무인도에서 이것저것 느낀 게 참 많습니다
. 하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무인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사소한 감정들이었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앞으로도 계속 남아있을 단 하나의 감정이 있습니다.

바로 현재의 삶에 대한 고마움입니다


 

저번에 신문을 보다가 프로야구와 프로배구에서 뒷돈을 받고 승부를 조작한 의혹이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에서는 제가 즐겨 보는 프로농구에서도 승부조작의 의혹이 있다고 했습니다. 농구를 좋아하는 팬으로써 참으로 안타까운 기사였습니다.

제가 본 기사에서는 작년에 발생한 프로축구 K리그 승부조작 사건을 주도한 김모씨가 검찰 수사에서 "프로농구에서도 3점슛과 관련된 승부조작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라고 진술했답니다.

이로 인하여 프로농구의 승부조작 의혹이 생겼고, 이에 남자프로농구 주관단체(KBL)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승부조작에 있어서 미리 교육을 했었고 신중하게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겠다고 했습니다.


확실히 아직은 정확하게 밝혀진 사실이 아니라 소문일 뿐이니 프로농구에서 승부조작을 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현재 프로농구에서 활동을 하고있는 한 선수는 농구는 "종목 특성상 조작이 쉽지 않다" 라고 했고 한 편으로는 "만약 조작이 존재했다면 같은 선수로서 실망감이 클 것 같다" 고 말했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농구라는 스포츠가 워낙 경기가 빨리 진행되고 선수 교체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승부조작이 많이 힘들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농구를 많이 좋아하고, 또 농구를 많이 해봤기 때문에 승부조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승부조작 의혹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정말 농구에 대해서 큰 실망을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포츠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저에게 정말 큰 충격일 것입니다.

농구 뿐만이 아니라 어느 스포츠에서도 승부조작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선수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에게 승부조작이 일어났다면 그건 이미 스포츠가 아닙니다!!!

연합뉴스에 있는 사진입니다.


그건 농구가 아니라도 어떤 스포츠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승부조작을 위해 선수에게 돈을 주는 사람도 나쁘지만 그 돈을 받고 경기를 져주는 선수가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경기라도 최선을 다하는 게 스포츠 정신이죠. 돈때문에 스포츠맨으로서의 자신을 포기한다는 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돈이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돈보다 야구선수든 배구선수든 농구선수든 그 선수로서 경기를 다해 임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쨋든 프로농구를 비롯한 모든 스포츠에서 승부조작 의혹은 물론 승부조작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농구를 좋아하는 한 고등학생으로서 농구가 영원히 '깨끗한 스포츠' 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제 농구공입니다.

 
제가 채식을 시작한 것도 이제 2일째가 됩니다. 채식을 시작한 어제는 그냥 '고기를 안먹으면 되겠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채식을 한 지 2일째가 되는 오늘 바로 그 생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고기 섭취를 참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습니다.

집에서는 그냥 밥을 먹으면서 김치나 김 등의 반찬을 먹으면 조금씩 고기에 대한 욕구가 없어지고는 했는데 밖에 나가서 식당 같은 곳에 가면 무척 힘들 것 같았습니다.

마침 학교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마산 놀러왔으니까 놀자" 그 친구는 멀리 사는 친구라 얼굴를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채식하는 걸 알고 있었는지 밥을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친구를 만나러 나가니 같은 마산에 사는 친구 몇 명이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저녁밥을 먹으러 갔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간 곳은 약간 저렴한 레스토랑... 돈많은 친구가 사준다기에 저는 신나서 메뉴판을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메뉴판에는 정말 맛있어보이는 스테이크, 튀김 요리, 스파게티, 피자 등 제가 좋아하는 인스턴트 음식이 무척이나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채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맛있어 보이던 음식들을 포기하고 그냥 작은 샐러드를 하나 시켜먹었습니다.

마침 행사중이라서 샐러드가 아니라 다른 음식을 시키면 피자 한 판을 무료로 준다고 했지만 저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맛있어보이는 스파게티를 먹고있었지만 저는 수많은 채소가 들어 간 샐러들을 먹고 있었습니다.

가격은 비슷했지만 얼마나 희비가 갈리던지... 친구들이 맛있게 스파게티를 먹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포크로 배추를 뜯어먹고 있는 제 모습이 무척 안쓰러워 보였는지 친구가 스파게티를 다시 시켜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번 시작한 채식!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샐러드를 다 먹었습니다.


맛있는 고기를 비록 먹지 못했지만 고기에 대한 꾹 참고 샐러드를 다 먹은 제가 너무나도 대견스러웠습니다. 채소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뭔가 제 몸이 상쾌해지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사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언제 또 야채를 많이 먹어보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그냥 채소에 길들여져서 채식이 끝나더라도 채소를 많이 먹는 습관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계속 블로그에 소홀해 지네요... 그래도 다시 힘을 내서 포스팅합니다. 오늘 포스팅할 내용은 바로 새로 산 운동화 자랑입니다!!!


어머니가 한 2주일정도 유럽으로 출장을 다녀오셨는데 오시자마자 제가 교과부 기자단에 합격한 소식을 들으시고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념으로 신발을 하나 사주시기로 했습니다. 사실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제가 발냄새가 많이 나는 편이라  신발을 자주 갈아신어야 되요.ㅠㅠ

아니면 보통 슬리퍼나 맨발로 다녀야한다는... 그래서 어머니가 이번에 화끈하게 운동화를 하나 사주신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번에 나이키 농구화를 하나 샀었는데, 평소에 농구화를 신고 다닐 수는 없어서 어머니가 계속 사주시려고 하셨답니다.^^
 

집에 가서 인터넷으로 새로 살 운동화를 계속 골랐습니다. 맘에 드는게 많이 있었지만 10만원 이하로 골라라는 어머니의 요청 때문에 약간의 제한이 있었어요.ㅠㅠ

그래도 비싸다고 다 좋은건 아니니까요. 저는 약 30분동안 계속 맘에 드는 신발을 골랐습니다. 그러다가 가격도 싸고 아주 예쁜 신발을 하나 골랐습니다.

아버지는 당장 어머니의 카드를 가져와서 사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장벽이 있었으니!!! 바로 '사이즈' 였습니다.

저는 발이 좀 큰 편이라 275에서 280사이의 신발을 신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고른 신발의 사이즈는 제 발에 맞는게 생산되지 않는군요....

기껏 30분동안 고민하면서 골랐는데 사이즈가 없다니!!!! 사이즈!!! 하지만 저는 포기가 빠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30분여를 고민하여 다른 신발을 골랐습니다.

신발끈을 서로 다른 색으로 묶어봤어요.ㅎㅎ 나만의 스~타일


제가 고른 신발의 이름은 '나이키 아이솔레이트' 이름이 무척 긴가요...? 여튼 디자인도 예쁘고 가격도 68900원으로 10만원을 넘지 않아서 바로 구입하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유치하게 생겼다고 하셨지만 금방 구입을 해주셨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번에는 또 구입이 안되네요.

무슨 쇼핑몰 사이트에 갑자기 이상이 생겼는지 잘되던 상품 구입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 정녕 신은 나에게 새 운동화를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

그래서 결국 그 날 신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회사에 가셔서 제가 골랐던 신발을 주문해놓으셨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구입한 새 운동화가 몇 일 전에 저희 집에 도착했습니다.

태국에서 지냈던 12일동안 우리 단원들은 총 8팀으로 나누어 홈스테이를 했습니다. 단원들이 홈스테이를 했던 마을은 우리들이 자주 갔던 '반부왁캉 학교' 와 가까이 있었습니다.

홈스테이 가정에는 미리 YMCA에서 우리들의 식비를 지원해줬고 각 가정에 두 명씩 들어가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언어소통을 도와줄 태국의 대학생도 같이 지냈습니다.

함께 생활했던 대학생들은 태국의 어떤 대학에서 영어 교육과를 공부하고 있는 누나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인 영어가 되서 태국어를 모르는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와 함께 홈스테이를 지낸 태국의 대학생은 'JOY(조이)' 라는 누나였는데 같이 온 대학생들중에서 영어를 가장 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홈스테이를 하면서 소통의 문제는 전혀 없었습니다. 만약에 빨래를 하고싶다면 그냥 간단하게 JOY누나에게 영어로 빨래를 하고싶다고 말하고 JOY누나는 태국어로 홈스테이의 엄마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홈스테이는 예상외로 아주 편했습니다. 가족들은 항상 우리들에게 친절했고 밥도 맛있게 챙겨주셨습니다. 태국은 고기가 싼 나라라서 맛있는 고기를 많이 먹었습니다.

홈스테이에서 제가 밥을 먹었던 식탁.

그리고 우리가 자는 곳도 아주 좋았습니다. 딱 봐도 3인용 침대인데 한국에서 같이 온 형과 저, 이렇게 둘 만 잤기 때문에 아주 넓고 편하게 잘 수 있었습니다.

홈스테이에서 제가 잤던 곳 입니다.

하지만 홈스테이를 하면서 힘들었던 점도 많이 있었습니다. 힘들었던 점은 세가지 정도가 있는데 그 첫번째가 바로 언어문제입니다.

영어를 할 수 있는 JOY누나에게만 의지를 하고 지내서 그런지 정작 가장 가까워져야 할 홈스테이 가정집의 식구들과는 너무나도 떨어져 지냈습니다.


언어가 달라서 소통도 안될뿐더러 저에게는 JOY가 있었기에 딱히 홈스테이 식구들과 친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게 아직도 아쉽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홈스테이를 하면서 두번째로 힘들었던 점이 바로 '화장실' 입니다. 태국의 화장실은 우리 한국의 화장실에 비하면 너무나도 더러웠습니다.

변기와 샤워기가 같이 있었고, 가끔씩 바닥에 벌레가 기어다니기도 했으며 또 천장이나 벽에 '도마뱀' 이 붙어있는 경우도 엄청 많았습니다.


그래서 샤워를 할 때마다 눈을 꼭 감고 엄청난 속도로 해야했습니다. 도저히 제 비위가 버티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일 심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변기' 입니다. 태국은 대·소변을 보고나서 변기에 물을 퍼담아 물을 내리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게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더럽고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변기에 물을 퍼담고 있을 때의 그 느낌은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도저히 화장실 사용은 태국에서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었고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홈스테이에서 힘들었던 것은 바로 '모기' 입니다. 사실 태국에 가기 전부터 제일 걱정하던 것이 바로 모기입니다.

태국의 모기는 한국의 모기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의 모기약은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스프레이를 뿌리고 모기 기피제를 몸에 발라놓아도 모기는 끊임없이 저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은 '모기들의 천국' 이라고 할 정도로 모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한 번 하고 나오면 모기가 세 방 정도 물려있었습니다.

정말 모기는 태국에서 보내는 12동안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모기에게 한 번 물린 곳은 일주일 내내 가려웠고 아무리 모기약을 발라도 가려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태국을 다녀온 지금도 가끔씩 태국에서 물린 곳이 가려울 때가 있습니다. 정말 태국에서 모기는 악몽이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한국에서 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모기는 잘 물리지 않지만 태국에서 모기 물렸던 곳을 보면 너무 긁어서 그런지 보기 않좋을 정도로 심한 흉터가 있습니다.

정말 태국에서 힘들었던 점이 많았던 것 같네요. 하지만 그 힘들었던 점을 모두 극복하고 12일동안 무사히 태국에 다녀온 것에 대해 저는 너무나도 뿌듯하게 느껴집니다.

역시 방학이라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심심하네요.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가 벌써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남해로 여행을 갔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블로그에 소홀했던 것 같네요. 구차해도 변명거리가 있습니다. 남해로 여행을 다녀오고나서 몇일간 몸이 아파서 계속 누웠있었습니다.

무슨 위염인가? 라고 불리는 병에 걸렸었는데 밥을 규칙적으로 안먹고 아이스크림같이 차가운 음식을 많이 먹어서 걸리는 병이라고 했는데 저와 딱 맞는 것 같았습니다.

남해에 친구들과 여행 가서 과자를 진짜 많이 먹었고,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도 정말 많이 먹었습니다. 그래서 위염에 걸렸던 것 같았습니다.

약 3일간 두통으로 집에 누워있었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제가 16년간 세상을 살아오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특히 그저께(7월 20일 수요일)에는 그날 하루만에 구토를 무려 6번이나 했습니다. 토를 한 번 할 때마다 무척 고통스러웠고 역겨워서 정말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바로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위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고 다행히 거의 다 나았다는 것도 알게되서 약간은 안심이 되었습니다.

제가 먹고있는 약입니다.


병원에서는 주사를 놓아주었고, 약국에서는 3일치의 약도 받았습니다. 약도 꾸준히 챙겨먹고 식단도 조절한 덕에 지금은 몸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얼른 몸이 회복되고 서울에 가서 해외자원봉사에 대한 사전교육을 받아서 8월달에는 태국으로 자원봉사도 떠나야합니다. 

방학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몸을 회복시켜야겠습니다. 
며칠 전 아버지와 함께 백화점에 갔습니다. 백화점에 간 이유는 제 아이팟 때문이었습니다. 아이팟을 처음 살 때에는 아이팟을 정말 깨끗하게 사용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팟을 사용하다보니 기스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케이스를 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케이스를 사러갔습니다.
 
케이스의 종류는 무난하게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고무 케이스를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가격도 5000원 이하라고 들어서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았습니다.

애플 매장에 가보니 케이스의 종류가 꽤 많이 있었습니다. 플라스틱도 있고, 가죽으로 된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중에 고무로 된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격은 꽤 비쌌습니다. 무려 18500원이나 했습니다. 다른 매장을 알아볼 수도 없고해서 그냥 그 케이스를 구입했습니다.

포장을 뜯어보니 만지면 말랑말랑해서 느낌이 좋은 케이스가 들어있었습니다. 케이스를 아이팟에 '장착'시켜보니 왠지 멋있었습니다.

그 케이스를 끼면 아이팟을 바닥에 떨어뜨려도 충격을 어느정도 흡수해주고 멋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기스가 나는 것도 어느정도 막아줄 것 같았습니다.


케이스를 끼운 상태로 아이팟을 뒤집어 보였습니다. 케이스 때문에 제가 아이팟을 처름 구입할 때 레이져로 새긴 '축 태봉고 합격'이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케이스를 끼우니 아이팟이 더 안전해보이고 더 예뻤습니다.

저는 포장을 한 통을 버리기 위해 통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뜻밖의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액정보호필름' 이었습니다.

그것도 '최고급'이라는 수식어가 함께 붙어있었습니다. 고무 케이스의 가격이 비쌌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액정보호필름 때문이었습니다.

완전 횡재했습니다.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면 기스가 생기는 걸 완전히 막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얼른 집에 가서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잘 안되서 아버지가 대신 붙여주셨습니다.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니 안에 기포가 발생해서 보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금방 아버지가 제거해주셨고 저는 아이팟을 사용해보았습니다.

확실히 터치감이 훨씬 좋아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남아있는 기포때문에 계속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케이스를 씌울 때에는 케이스에 보호필름이 걸려서 결국에는 필름이 벗겨졌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이에 먼지가 들어가서 완전히 이상하게 되버렸습니다. 저는 다시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버지는 몇 번 만져보시다가 저에 필름을 버리라고 권하셨습니다.

저는 반대했습니다. 필름은 비싸기 때문에 너무 아깝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먼지가 들어간 것은 어쩔 수 없다며 단호하게 필름을 버리셨습니다.

확실히 필름을 벗기니 아이팟에 기포가 보이지 않아 훨씬 깨끗해 보였습니다. 필름을 끼우면 좋겠지만 너무 귀찮고 짜증났습니다.

그냥 아이팟 기존의 모습이 가장 편하고 예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필름 없이 사용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냥 케이스만 끼우고 사용해 갈 생각입니다.
드디어 중학교의 마지막 시험이 끝났습니다. 3학년은 고등학교를 준비해야하기 때문에 기말고사를 다른 학년들보다 일찍 칩니다.

그래서 중간고사가 끝난지 얼마 안되어서 다시 기말고사 준비를 하느라 블로그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몇 일 쉬고 나서 블로그를 다시 시작하려고 했는데 제가 발을 다치고 말았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가 공이 다른 곳으로 굴러가서 제가 주우려고 가다가 그만 쇠를 밟아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아프지 않아서 별 생각없이 농구를 계속했지만 농구를 하다보니 발이 점점 아파왔습니다.

농구를 끝내고 양말을 벗어보니 발은 이미 피가 많이 난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많이 아프지는 않아서 그냥 대충 물로 피를 씻고 점심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있는 순간에도 피가 계속 나서 저는 결국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교무실로 갔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병원에 한 번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선생님, 그리고  저 이렇게 세 명은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에서는 제 상처를 보고 꿰매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시고 어머니가 결국 병원으로 오셨습니다. 친구는 제 가방과 신발을 가져다 주고 선생님께서는 학교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상처난 곳을 꿰매기 위해 병원 침대에 누웠습니다. 먼저 마취를 하기위해서 간호사 누나는 제 발에 주사를 놓았습니다.

아무래도 발가락 쪽이어서 그런지 주사를 놓을 때 무지 아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는데 마취가 잘 안됬는지 바늘을 꽂을 때 엄청난 고통이 저를 덮쳤습니다.


제가 아프다고 살짝 비명을 질렀는데 간호사 누나는 계속 상처를 꿰맸습니다. 바늘을 한 번 꽂을 때마다 발에 주사를 놓는 듯한 고통이 저를 계속 괴롭혔습니다.

마치 영화에서 주인공이 총을 맞고 총을 맞은 곳을 꿰매는 듯한 모습이 바로 제 모습같았습니다. 그렇게 힘든 수술이 끝나고 항생제를 맞은 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왔습니다.

저는 곧바로 발을 다친 내용으로 블로그를 한 개 쓰려고 했으나 아까 힘든 수술을 받느라 온몸의 힘을 다 써버려서 몸은 무척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에 와서 바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날인 오늘 이렇게 블로그를 한 편 써봅니다. 다친것이 무척 후회되고 발이 아파서 엄청 힘들지만 이것도 다 나으면 언젠가는 그냥 조금 힘들었던 추억으로 기억될 것 입니다.

다친 게 자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지금 이 순간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어제는 학교에서 집으로 바로 오지않고 수행평가를 하기 위해서 친구집에 잠깐 갔다 왔습니다. 수행평가를 다 끝내고 나니까 벌써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저는 안그래도 처음와보는 곳이고 밤까지 어두워져서 친구에게 버스정류장까지 자전거를 태워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서 버스가 도착했고 저는 그  버스를 탔습니다.

피곤해서 그런지 잠이 조금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버스안에서 한 5초 정도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었는데 제가 어느새 제가 내릴 곳에 다 도착해서 저는 얼른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만 해도 제가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저는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슈퍼마켓이 보이길래 군것질을 하려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갑은 주머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덤덤하게 가방을 열어서 지갑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가방 안에도 지갑은 없었습니다.

저는 약간 당황했습니다. 저는 다시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하지만 역시 지갑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 제가 지갑을 잃버렸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저는 제가 지나왔던 길을 둘러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갑을 땅에 흘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 때 저는 방금 버스에서 잠깐 졸았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갑을 버스에 흘렸던 것 입니다. 무척 큰 일 이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지갑 안의 내용물이 아주 중요한게 많았습니다.

돈은 한 3000원 정도 들어있었지만 학생증과 도서관대출증, 마이비카드가 모두 지갑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갑을 아주 통째로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돈을 잃어버린 적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린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그래도 학생증이 들어있으니까 누군가 주우면 찾을 수는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마음씨가 나쁜 사람이 줍는다면 아마 저는 지갑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 입니다.

사실 학생증이나 도서관대출증, 마이비카드 같은 것들은 다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잃어버린 지갑은 아버지가 선물로 주신 아주 소중한 물건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받아서 지금까지 아주 아끼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한방에 잃어버리다니... 정말 뭐라 말이 안나옵니다.

제가 만약 지갑을 줍는다면 착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파출소에 가져다주거나 주인에게 반드시 돌려줄 것 입니다.

이번에 잃어버린 지갑을 누가 주워서 다시 제 손으로 돌아온다면 당연히 그 지갑을 더 소중히 여길 것 이고 정말 앞으로 착하게 살아갈 생각입니다.

저는 솔직히 사람이 살아가면서 티끌 하나 없이 정말 착하게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잘못을 한 적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지갑을 찾는다면 정말 제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지었던 죄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서 반성하고 또한 세상의 하나하나까지 감사하며 살아갈 것 입니다.

또한 남에게 선행을 베풀며, 어른들의 말씀과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제가 살아가고 있다는 자체에 감사하며 살아갈 것 입니다.
요즘에는 어머니가 집에 안계셔서 꼭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예전과는 다르게 회사를 일찍 가시지 않아서 늦게 일어나도 아버지에게 라면정도는 끓여줄 수 있습니다.

저번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겠다고 다짐은 했지만 요즘은 너무 늦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어젯밤에 저는 12시 정도에 잤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12시에 일어났습니다.

무려 12시간을 잠으로 보낸 것 입니다. 보통은 10시 정도에 일어나는데 10시에 일어나서 아버지도 다시 주무시길래 같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한 숨 자고나니 12시였습니다. 늦게 일어나도 너무 늦게 일어납니다. 그래도 아침에 무척 개운하기는 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잔 것은 처음이라서 정말 상쾌한 마음으로 일어났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시간 때문에 점심을 먹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내용을 블로그에 한 번 올려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좋은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블로그에 글과 함께 올릴 사진이 없습니다.

제가 잠을 청한 침대를 찍어서 올릴 생각도 해보았지만 12시간 정도를 잔 침대라고 하기에는 침대가 너무 깔끔했습니다.

제가 잤던 침대는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원래는 침대가 완전 어지러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일어나서 깔끔하게 정리를 했죠. 그래서 어떤 사진을 올릴까? 생각하다가 결국 그냥 침대를 찍어서 올리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침대를 다시 이상하게 어질렀습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침대를 어지럽히다니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침대는 다시 제가 잔 침대의 모습을 취했습니다. 약간 설정한 티가 나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저와 아버지가 12시간동안 잔 침대라고 보여졌습니다.

지금 글을 쓸 때에는 12시간 동안 잔 이야기가 단지 웃긴 이야기일뿐이지만 사실은 아주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잠을 많이 자지 않습니다.

저는 원래 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이 잔 것입니다. 많이 자면 좋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잠을 자는 행위가 TV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체력소모가 심하다는군요.

잠을 잘 때에는 특정 부분을 제외한 몸의 모든 기능이 정지하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TV를 보는 것보다 많다고 합니다.

잠을 많이 자면 피부는 좋아지겠지만 건강에 그렇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일(8월 1일 일요일)이면 어머니도 돌아오시니까 다시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인터넷에 잠을 많이 자면 몸에 이상이 있는지 검색해보았더니 잠을 많이 자면 뭐 살도 찌고 머리도 멍해져서 여러모로 그냥 잠은 규칙적으로 자는게 좋다는군요.

제 건강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겠습니다.
아무리 나이키라도 오래 쓰면 떨어지네요

저는 1년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졸라서 나이키 신발을 구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역시 나이키라서 그런지 신발은 저에게 충분히 멋있고 만족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하얀색이라서 그런지 금방 더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신발을 아주 자주 빨아야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빨아서 쓰던 중 다른 신발을 사게되고 그 신발을 신게 되면서 나이키 신발을 신는 경우는 드물어졌습니다.

그렇게 3학년이 되고 저는 또 신발을 샀습니다. 그 신발은 나이키에 못지않는 '필라 신발' 이었습니다. 그 신발을 사게되면서 나이키 신발은 저에게 점점 잊혀지게 되고 결국 다시는 신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을 이사하게 되고 신발장을 정리하면서 이미 낡아버린 나이키 신발을 보게되었습니다. 저는 그 신발을 세탁소에 맡겨 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직접 신발을 빨았습니다. 돈이 아까워서라기 보다는 그냥 제 손으로 그 신발을 깨끗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처음 살 때에는 엄청나게 좋아했고 멋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러워지면서 점점 저에게서 잊혀져간 신발이 다시 저의 손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모습을 보고싶었습니다.

사람마다 하나씩은 있을 것 입니다. 자기 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물건, 저에게는 그 신발이 그런 존재입니다. 단순히 나이키라는 상표 때문에 그런게 아니라 제가 처음으로 신발을 사면서 기분이 좋았던 신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시 오랫동안 신발장에 넣어두어서 그런지 무지하게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씻기도 무척 힘들었습니다. 저는 최대한 세게 씻었습니다.

다른 곳도 많이 찢어졌습니다.

그런데 너무 세게 씻어서 그만 신발이 찢어졌습니다. 분명히 찢어졌습니다. 이미 신지 않는 신발이라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도 않았습니다.

사흘동안 신발을 말리고 나서 그 신발을 신고 아버지와 외출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에 비가 왔습니다.

저는 혹시라도 찢어진 틈으로 빗물이 들어올까 일부러 물웅덩이를 피해다녔습니다. 다행히 빗물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신발을 비오는 날에 계속 신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찢어진 신발을 신고다니면 친구들이 놀릴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신발을 빨면서 찢어진 것도 다 추억입니다.

저는 그 신발을 버리지 않고 할아버지댁에 가져다놓을 생각입니다. 이번 방학 때에 할아버지 댁에 쌀을 가지러 잠깐 가는데 그 때 신발을 갖다놓을까 합니다.

할아버지 집은 제가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추억이 많이 쌓인 곳 입니다.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돌아가셔서 시골에 내려갈 일이 별로 없으니까 저의 추억이 담긴 그 신발을 집에 놔두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 방학이라서 그런지 아침에 제가 너무 늦게 일어납니다. 원래는 학교때문에 7시에는 일어났는데 학교를 안가니까 3시간이나 더 자서 10시에 일어납니다.

저는 생활계획표에 9시 기상이라고 적어놓고 또 휴대폰 알람도 9시에 맞춰놨습니다. 그런데 9시에 알람이 울리면 알람을 끄고 다시 잡니다. 그리고 10시가 넘어서야 일어나서 '어 왜 알람이 안울렸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9시에 일어나도 늦은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8시에 출근하시는데 인사라도 해드려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일부터는 8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아버지, 어머니가 출근하실 때 인사를 해드려야 겠습니다.

8시에 일어나는 제 생활계획표 입니다.


그런데 그게 쉽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9시에 일어나는 것도 힘든데 8시에 일어나려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사실 저는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아침만 되면 왜 그렇게 피곤한지 모르겠습니다. 밤에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나질 것 같은데 사실 방학만 되면 밤에 잠이 잘 안옵니다.

저도 일찍 일어나서 아침 일찍 부터 출근하시는 부모님께 밥이라도 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그게 잘 안됩니다.

하지만 노력이라도 해봐야 안되겠습니까? 저는 집에서 계속 쉬고 어머니, 아버지는 회사에 나가셔서 열심히 일하시는데 제가 더 늦게 일어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내일부터는 아침 8시에 꼬박꼬박 일어나서 어머니, 아버지에게 밥이 안된다면 인사라도 드려야겠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학교를 간다고 생각하면 일찍 일어나질까요?

방학 전 시험기간에는 학교에 가서 미리 공부하려고 6시에도 일어났는데 왜 8시에 못일어나겠습니까? 정말 8시에 일어나자고 마음만 먹으면 아침 일찍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방학이라고 해도 늦잠을 너무 많이 자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행동인 것 같습니다. 이러다 정말 방학이 끝나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등교를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다시 들여야 겠습니다.
저번주 토요일 저와 어머니, 아버지는 고향 남해에 마늘을 뽑기 위해서 남해에 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 전에 저와 아버지는 제 방에 있는 2층침대를 분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2층 침대를 남해에 갖다 놓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아버지는 2층 침대를 힘들게 분해한 후 트럭을 한 대 불러서 남해로 출발했습니다.

어머니는 트럭에 자리가 없어서 시외버스를 타고 남해로 출발하셨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남해에 도착해서 분해한 2층 침대를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리산에 갈 때보다는 아니었지만 정말 죽을만큼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힘을 좀 쓰니까 몸이 개운하고 뻐근한 느낌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침대 조립을 하던 도중 침대와 세트인 책상위치를 잘못잡아서 책상을 다시 옮겨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그런데 책상을 다시 옮기기에는 방이 너무 좁았습니다.
 

확실히 고향집은 천정이 높으니까 2층 침대가 폼이 났습니다.


그래서 저와 아버지는 고민 끝에 책상은 그대로 놔두고 침대 자체를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그렇게 침대를 옮기던 중 그만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어떻게 책상이 아닌 침대를 옮길 생각을 했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침대를 힘들게 조립하던 도중 어머니가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돼지고기를 사오셨습니다. 저는 고기 생각에 더 힘이 나서 침대조립을 완성했습니다. 확실히 2층 침대는 아파트에 있는 것 보다 시골주택에 있는 것이 훨씬 더 폼이 났습니다.

우리는 잠시 쉬다가 할아버지 집을 깨끗이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얼마전에 돌아가시고 두 달 정도 집에 아무도 없었던 탓에 집안 곳곳에 거미줄이 칭칭 감겨있었습니다.

군데 군데 거미줄이 많았습니다.


저는 청소기로 거미줄부터 깨끗하게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몇 번 쓸고닦고 하다보니 집은 다시 제 모습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 밤이 깊고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서 숯불에 돼지고기를 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군침을 삼키며 돼지고기를 한 입 먹었습니다.


일하고 나서 먹는 돼지고기의 맛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고기를 다 먹고나서 냉면을 먹었습니다.

역시 식당에서 먹는 냉면보다 집에서 직접 해먹는 냉면이 훨씬 맛이 좋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맛있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저는 오늘 힘들게 가져온 2층 침대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저는 원해 할아버지 집에서 잠이 잘 오지않는 체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익숙한 2층 침대에서 자니까 잠이 훨씬 잘 왔습니다. 저는 그렇게 편안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들은 일어나자마자 마늘을 뽑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밭에는 이미 동네의 다른사람들이 마늘을 모두 뽑아놨습니다.

우리는 덕분에 할 일이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마늘부위만 잘라서 망사에 담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저와 아버지는 집에 돌아가서 일에 필요한 장비들을 가지러 갔습니다. 저는 집에 간김에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웠습니다.

그리고 밭에 가보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매우 열심히 일을 하고계셨습니다. 저도 얼른 그 일에 동참했습니다. 저는 신들린 속도로 마늘을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손을 거친 마늘들은 속수무책으로 잘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마늘을 많이 잘라도 마늘들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던 중 어머니가 갑자기 집에 먹을 것을 가지러 들어가셨습니다. 어머니가 간 후 동네의 한 할머니께서 간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그 간식들로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컵라면을 싸오셨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간식을 먹고나서도 그 컵라면을 모두 해치웠습니다.

이제 배도 부르고 우리들은 더욱 열심히 마늘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늘을 다 자르고 우리는 이제 마늘을 망사에 담기시작했습니다.


이미 많이 지친 몸이라서 마늘 담는 일이 더욱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계시는 여러분들은 마늘 담는데 별로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시지 않겠지만 마늘의 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잠시 그늘에서 쉬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 틈에 남은 간식을 모두 해치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쉬다가 다시 30분 정도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모든 일을 끝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늘을 조금 챙겨서 마산에 있는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어젯밤 남은 돼지고기를 넣은 맛있는 찌개와 함께 점심을 먹고 1시간 정도 잠을 잤습니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몸이 많이 지치고 피곤한 상황이라 잠이 아주 잘 왔습니다. 1시간 후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서 다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동네친구분의 차를 타고 마산으로 돌아가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습니다. 오랜만에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해보니 공부하면서 느끼는 피곤함과 스트레스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수확한 마늘을 돈으로 치면 약 30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하루동안 일하면서 번 돈 보다 많은 액수이지만 어머니는 이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30만원을 벌기 보다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공부 안하고 이렇게 일해서 돈을 벌 바에야 차라히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게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힘들게 일한 것을 계기로 하여 앞으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저번주 화요일(3월 2일) 드디어 제가 3학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미리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한 통 받고 할아버지께서 계시는 병원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엄청 위독하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얼른 병원으로 갔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침대에 누워계시고 아버지와 고모 두 분께서 울고계셨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간호사가 들어와서 할아버지의 상태를 검사하고 할아버지께서 사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들은 고모들과 아버지는 대성통곡을 하시면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 계시던 어머니도 울고계셨습니다. 저도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조금 뒤에 량호네 가족이 병원으로 와서 할아버지의 옆에서 울었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병원에 있는 할아버지의 물건을 챙겨서 집으로 옮겨놓고 다시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에는 우리 친척들이 장례식장에서 울고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후에 남해에서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사진에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건강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이제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또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몇 시간 뒤 모든 친척들이 장례식장에 왔습니다. 친척들은 모두 함께 할아버지께 절을 하고 할아버지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어른들은 할아버지께서 고통없이 편안하게 돌아가셔서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물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니 무척 슬펐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셔서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는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때 갑자기 돌아가셔서 충격때문에 엄청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제사가 끝나고 우리들은 잠시 쉬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가 개학하는 날에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여름방학이 끝날 때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께서는 봄방학이 끝날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두 분 모두 제가 학교를 조금 쉬라고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중학생이니 상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문상객들이 올 때마다 곡을 하면서 절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상복이 편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졌습니다.

하지만 상복을 벗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3일 동안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지내다가 우리들은 모두 할아버지의 고향인 남해로 갔습니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동네의 어른들과 인사를 하고 할머니께서 묻혀계시는 산으로 갔습니다. 할머니께서 묻혀계신 옆자리에 할아버지의 관이 들어갔습니다.

하필 그 때 비가 많이 와서 고생을 좀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빌며 기분좋게 상복을 벗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할아버지의 집으로 갔습니다. 마침 주말이라서 어른들께서도 시간이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남해에서 2일동안 더 있기로 했습니다.

2일동안 남해에서 지내면서 할아버지의 집을 깨끗히 청소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물건도 정리를 했습니다. 2일이 지나고 집에 가는 날이 되자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집에 남아서 일을 하고 가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저, 아버지, 삼촌네 가족, 량호네 가족도 함께 남해에 하루만 더 남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버지만 남기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도 이제 내일이면 다시 학교에 나가야합니다. 이제 진짜 드디어 3학년이 되네요.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학원도 많이 빠졌고 학교수업도 많이 빠졌습니다.

이제 3학년이 되면 그 만큼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어젯밤(1월 25일 월요일)에 아버지가 한 동영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동영상은 지난 2009년 11월에 일어난 '사이판 총격사건' 에 대한 동영상이었습니다.

사이판 총격사건이란 우리나라 마산시에 사는 한 가족이 친구들과 사이판에 여행을 갔을 때 사이판의 현지인이 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총기를 난사한 사건입니다.

그 사건으로 사이판에 놀러갔던 '박재형' 씨는 총을 맞고 네 번의 수술 끝에 하반신 마비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운이 나쁜게 아닙니다.

사이판의 만세절벽이라는 곳입니다. 이 근처에서 총에 맞았다고 합니다.


그는 가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반신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가장으로써의 일을 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생계까지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이판에서는 그 가족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사이판에 놀러가서 사람이 총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가 되었는데 아무런 보상이 없다니?

저는 사이판이라는 나라에게 무지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동영상을 계속 봤는데 우리나라도 그 사람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안해준다는 군요. 아니, 우리나라의 사람이 다쳤는데 아무런 보상이 없다니?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게다가 제일 중요한 박재형씨 가족이 사이판으로 여행을 갈 때 이용한 여행사도 아무런 보상이 없다네요.

참 내가 어이가 없어서 여행사가 여행자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인데 보상이 없나니... 피해를 당한 사람은 있는데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다...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소리네요. 저는 이 글을 쓰기위해서 네이버에 '사이판 총기' 라고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이판에서 총기를 난사했던 범인이 사이판의 사격장 종업원이라는 내용들만 나와 있더군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지금은 다친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중요하지 범인에 대한 게 지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텔레비전에 방송된 사이판 총격사건.


총을 쏜 사람은 확실히 나쁜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자신도 총으로 자살을 했다는 군요.하지만 지금 중요한건 피해자에게 보상을 해주는 것 입니다.

저도 마산에 살고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이 외국에 갔다가 총을 맞고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저는 그저 속상한 마음뿐입니다.

사이판에서는 지금 피해자들은 위한 모금활동을 하고 있다는 군요. 그 모금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정말 사이판이라는 나라를 증오하고 저주했을 것 입니다.

사이판도 모금활동을 하는데 우리나라도 피해자들은 위한 모금활동을 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에서 모금활동을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사이판이라는 나라보다 못한 나라입니다.

사이판 총격사건이 발생하기 정확히 1주일전 부산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일본인 많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사죄를 하고 당장 보상을 해주기 위한 노력을 하고있습니다.

하지만 사이판은 지금 모금을 한다는 소리한 해놓고 아무런 보상을 하고있지 않습니다. 정말 부산에서 일어난 사건과 극단적으로 비교가 되는군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일본사람들이 피해를 받았을 때는 보상을 위한 노력을 엄청 기울이고 있는데 정작 우리나라의 사람이 피해를 받았을 때에는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가 이것밖에 안되는 나라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빠른 시일내로 박재형씨에게 많은 위로와 보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일전 저는 어머니와 함께 치과에 갔습니다. 어머니는 잇몸이 안좋으셔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치과를 꼭 다니십니다.

그리고 저는 충치가 좀 생긴 것 같아서 치과를 갔습니다. 저는 치과를 가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초등학교때에는 치과를 많이 갔었는데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치과를 한 번도 간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왠지 치과가 조금 낯설고 무서웠습니다. 저는 진찰을 받으려고 진찰대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어린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그 울음소리를 듣고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저의 이빨을 몇 번 들여다 보시더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긴장된 마음으로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앞에 있는 컴퓨터에 어떤 사진 6장이 있었습니다. 그 사진은 전부 저의 썩은 이빨들의 사진이었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제가 본 저의 이빨들은 모두 썩을대로 썩어서 보기가 힘들정도로 더러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빨은 무려 6개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이후로 제가 이빨관리에 소홀히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의사 선생님도 저에게 이빨을 잘 닦아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잠시후 의사 선생님은 제 입을 벌리더니 제 잇몸에 주사를 한방 놓으셨습니다. 주사 안에 있는 약이 제 잇몸을 통해서 몸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란 그야말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제가 인생을 살면서 맞았던 그 어떤 주사보다도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사를 맞고 5분동안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입이 얼얼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까 맞았던 주사는 바로 마취를 위한 주사였던 것 입니다.

저는 살면서 몸의 일부분을 마취시킨 경우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충치치료 때문에 처음으로 마취를 당했습니다.

마취의 느낌은 뭐랄까... 음 마취한 그 부분이 마치 다리가 저릴 때의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저는 혹시 진짜로 마취가 된 것 인지 확인하려고 제 혀의 일부분을 깨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말그대로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입이 혀를 포함해서 거의 절반이 마취가 된 것 이었습니다.

치과에 나와서도 마취는 게속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저녁 때 쯤에 마취가 풀린다고 하셨습니다. 마취때문에 음식을 먹을때 아픈 것을 못 느껴서 계속 제 입안의 살을 씹었습니다. 정말 마취는 불편하고 힘들었습니다.

이윽고 제 이빨의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무슨 톱같은 물건으로 제 입안을 갈겼습니다. 그런데 아프기는 커녕 오히려 시원했습니다.

제 이빨에 있는 충치가 시원하게 갈리는 느낌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입을 계속 열고 있어서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꽤 참을만 했습니다.

잠시후 치료가 끝났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썩은 제 이빨 6개 중에서 하나만 치료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은 결국 앞으로 남은 5개의 이빨을 더 치료해야하고 또 그 말은 결국 마취 주사를 5번이나 더 맞아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 내일(1월 14일 금요일) 치과에 한 번 더 가야합니다. 그 때는 부디 마취 주사가 아프지 않고 치료가 잘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교훈은 이를 잘 닦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사실 이빨만 잘 닦았어도 치과에 가지 않았을 것 입니다. 오늘부터는 이빨을 정말 열심히 닦겠습니다.
지난 21일은 근현대사캠프의 마무리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일단 학교를 마치고 아버지의 회사로 가서 짜장면을 맛있게 먹고 YMCA로 갔다.

그곳에 가니까 근현대사캠프의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청소년문화의 집에서 전화가 왔다. 그랬다. 그 날은 독서토론도 해야하는 날이었다.

근현대사와 겹쳐서 나는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청소년문화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내가 초등학교때 매우 친했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무척 반가웠다. 우리는 독서토론을 끝내고 함께 YMCA에 가서 오랜만에 같이 놀았다. 한참동안 그렇게 놀다가 그 친구는 집에 가고 나는 YMCA에 남아서 근현대사캠프의 마무리를 준비했다. 내 역할은 사진을 보고 그 사진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5, 6월에 간 근현대사캠프의 사진을보고 멘트를 준비했다. 멘트는 생각보다 쉽게 생각났고 빠른 속도로 머릿속에 집어넣고 다른 아이들이 준비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5시에 행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의 발표가 시작되고 마침내 가 발표할 차례가 되었다. 나는 미리 외워둔 멘트로 발표를 술술해갔다.

그런데 내가 미리 멘트를 준비하지 못한 사진이 나왔다. 나는 참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생각나는대로 사진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6월의 사진이 나왔다. 이건 정말 아예 기억도 나지않는 사진들이라서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않았다.

결국 나는 6월 발표를 하지못하고 중간에 무대에서 내려왔다. 나는 얼른 선생님께 아 상황이 어떻게 된것인지 여쭤보았다.

선생님께서는 실수로 나에게 사진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무척 안타까웠다. 그래도 어머니와 선생님께서는 발표를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오늘 발표로 나는 준비를 철처히 해야겠다는 큰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는 이런 실수가 없기를 바란다.

미리 욕조에 물을 받아놓은 모습입니다.

이틀전 11월 12일에 나는 수능때문에 학교를 가지않고 집에서 한가하게 TV를 보며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그래서 나는 얼른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볼일을 보았다. 그런데 변기의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변기가 고장났다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수돗물을 틀어보았다. 그랬더니 수돗물도 나오질 않았다. 내눈에 보이는 것은 욕조에 담겨있는 물뿐이었다.

나는 얼른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그리고 어머니께 이 기이한 일들에 대해서 샅샅이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는 오늘 물탱크를 점검한다고 물이 안나오니까 미리 욕조에 받아놓은 물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랬다. 오늘은 물이 나오지 않는 날이었다.

작년에도 이런 일이 몇 번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어머니께서 내 옆에 같이 계셔주셔서 별로 걱정안하고 평소처럼 생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니가 없어서 변기에 물을 내리지도 못했다. 어머니께서는 변기에 물을 부으면 된다고 하셨지만 나는 그게 잘 되지않았다. 그래서 나는 볼일도 왠만하면 잘 보지않았다.

나는 수돗물이 안나와서 카레밥을 만들때도 정수기물을 받아서 힘들게 만들어먹고 손을 씻을 때는 미리 욕조에 있는 물을 조금씩 받아서 힘들게 씻었다.

그리고 한참 뒤 엄청나게 볼일이 급했다.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변기에 볼일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변기의 물을 내렸다.

그랬더니 정말 쉬원하게 물이 촤악~ 내려갔다. 드디어 길고 긴 물과의 사투가 끝난 것이었다. 수돗물도 아주 잘 나왔다. 정말 오늘 물이 나오지 않은 것이 꿈만 같았다. 이번에 물의 소중함을 혹독하게 깨달은 것 같다.

저번에 나에게 엄청 거슬리던 피딱지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코밑에 있는 여드름을 짜다가 피가 나서 생긴 딱지였다. 그 딱지때문에 나의 얼굴이 엄청 못생겨 보였다. 그런데 저번에 그 딱지가 콧바람을 부니까 갑자기 떨어졌다. 나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나는 엄청난 속도로 거울을 향해 달려갔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고 나는 엄청 기분이 좋아졌다. 왜냐하면 딱지가 붙어있기 전보다 훨씬 얼굴이 깨끗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딱지가 떨어진 나의 얼굴

이번 여드름 피딱지가 생기고 떨어진 이유로 나는 여드름을 함부로 짜거나 건드리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드름을 함부로 했다간 얼굴이 아주 보기 싫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 피딱지가 생긴 이후로 밖에 나가기가 부끄러워졌다. 왠지 내 코밑에 있는 피딱지를 보고 사람들이 아주 이상하게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왠만하면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하지만 딱지가 떨어진 이후로 내 얼굴에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는 밖에 나가고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여드름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겠다. 이번과 같이 내 얼굴이 보기 싫게 되지 않도록...

떨어져 나간 내 피딱지.

오늘은 스키캠프의 2번째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숙소1층에서 밥을 먹고 잠깐 쉰 뒤 다시 스키복을 입고 보드를 타는 아이들과 함께 스키장으로 갔다. 아침에 일어난지 얼마 안되서 그런지 첫째날 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어쨋든 우리는 첫쨋날에 가르쳐 준대로 보드를 신고 스키타는 곳으로 갔다.

우리는 일단 발목운동을 했다. 보드를 탈 때 발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준비운동을 간단하게 한 뒤 조금 위로 올라가서 첫쨋날에 배운 것 들을 복습했다. 첫쨋날에 배운 것은 앞으로 가면서 중심잡기, 뒤로 가면서 중심잡기, 속도 줄이기 등을 배웠는데  몇가지만 간단히 하고 초급자용 리프트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우리들은 이제 옆으로 가는 것을 연습했다. 처음에는 조금 어려웠는데 첫째날에 잠깐 배워서 그런지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졌다. 우리는 옆으로 가는 것을 계속 연습 했다.

그런데 어떤 성락이 라는 초등학생 아이가 내려오면서 계속 앉아있는 나의 등을 쳤다. 보드로 맞아서 그런지 엄청 아팠다. 처음에는 그냥 조심하라고 했지만 점점 계속 치니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 성락이라는 애한테 눈을 던졌다. 엄청 차가워 했다. 성락이는 보드를 꽤 잘타는데도 속도조절을 못해서 계속 나를 쳤다. 그래서 나는 결국 성락이 보다 뒤에 출발했다. 그러니까 문제는 해결됬다.


우리는 오전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숙소에서 어떤 형의 PMP로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다가 다시 오후수업을 받으러 스키장으로 갔다.


거기에서 우리는 일자로 쭈욱 가다가 옆으로 쫘악 미끄러지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해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연습하다가 아까 배운것을 시험 쳤는데 내가 꼴지로 합격했다. 솔직히 나도 합격했는지 잘모르겠다. 조금 부끄러웠다. 오늘은 왠지 첫째날보다 더 힘들었다.
요즘 나는 감기몸살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저번주 금요일부터 감기가 걸려서 오늘까지 계속 아팠다. 저번주 주말에 가장 많이 앓았고 수요일에는 학교수업 중간에 병원까지 다녀왔었다.

처음에는 머리가 조금씩 아프더니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날씨가 추워서 잠깐 그러는 거겠지... 하면서 그냥 넘어갔지만 열이 점점 심해지면서 콧물도 계속 나왔다. 그래서 밤에 계속 코를 풀어댔다. 새벽에 내가 코를 푸는 소리에 부모님께서 자꾸 께셨다. 나는 정말 죄송했다.

처음에 머리가 아팠을때는 그냥 집에있는 감기약을 먹다가 점점 상태가 안좋아지니까 약국에서 종합감기약을 사서 먹었다. 그래도 감기가 나아지지 않아서 결국 병원을 가서 주사를 맏고 약을 받아먹었다. 그러니까 점점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저번주 주말에는 아예 그냥 하루종일 따뜻한 방안에 보일러를 틀어놓고 계속 잠만 잤다. 정말 너무 아팠었다. 지금까지 걸려본 감기중에서 가장 힘든 감기였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서 처음으로 걸린 감기 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내게는 소중한 추억이다.
난 저번 주에 중간고사를 쳤다.
그런데 미술 때문에 시험을 망쳐버렸다.
다른 건 다 그럭저럭 잘했는데 미술실기시험을 49점을 받아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못그렸지만 49점은 너무했다.
그 점수 때문에 평균을 76점 밖에 받지 못하였다.
너무 아쉽다.

부모님, 께서는 괜찮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본인인 나 자신은 별로 괜찮지 않다. 초등학교 때는 그림을 잘 그렸는데... 중학생이 되니까 스트레스 때문에 잘 못그린것 같다.

이렇게 생각 하고 싶지만 다른 친구들도 나와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왜 나만 잘 못 그린 것 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번은 중간고사다!
다음! 2달후 기말고사는 꼭 잘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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